동로마제국의 광장(2)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가보면

1500여년의 역사를 지켜온 하기아 소피아는 그리스 정교의 총 본산이며 비잔틴 건축의 백미라는 의미를 함께 지녔다. 중앙의 돔을 지탱하기 위해서 주변에 수많은 작은 돔을 사용하는 방법은 훗날 이슬람 건축에 핵심적 요소가 되었다.

특히 성전의 내부에 벽면 장식으로 사용된 모자이크는 중세 종교미술의 전형적인 사례로서 그 화려함과 섬세함, 기록화적인 의미 모두 갖추고 있어 오늘날 당시 종교, 문화, 역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오늘은 벽면 모자이크를 통해서 비잔틴의 미술과 제국의 역사를 알아보자.

성전은 거대한 미술관

원래 동방 기독교 세계는 형상 표현이 뛰어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단순한 십자가 상으로 상징성만 갖추었지만 점차 구체적인 인물 묘사쪽으로 발전했다. 이것은 불교에서 석가모니 사후에 초기에는 없었던 불상들이 사후 200 여년이 지나면서 만들어지는 결과와 유사하다고나 할까? 물론 이때도 불교의 독자적인 변화는 아니었다. 외래문화인 그리스문화가 전래된 간다라 지방에서의 변화였다.

기독교 교회 내부는 실내장식을 위해 주로모자이크를 사용했다. 그리고 구체적 형상 묘사를 위해 벽이나 천장에 유리, 보석, 색채가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 등을 회반죽한 후에 촘촘히 채워나간다. 중세에는 이런 기법이 점점 발달해 그 섬세함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또 그 배경에는 금박 을 유리조각 사이에 넣어 작게 조각내어 벽면에 붙이는데 서로 다른 조각들은 똑같은 평면을 이루지 않고 약간씩 들쑥날쑥 면을 이루기 때문에 그 반사가 각양각색이라 걸어가면서 볼 때 황금색 벽면이 호화찬란하며 1000 여년이 지난 현재도 전혀 퇴색함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기아 소피아 성전에서 초기의 모자이크는 볼 수 없다. 지어질 당시모자이크가 어떠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까닭은 8세기경이 있었던 성상 파괴운동 때문이었다. 황제 레오3세(제위717-741)부터 시작된 이코노클래즘(성상파괴운동)은 두 번에 걸쳐 120년 동안 지속 되었다.

이 기간에 비잔틴 제국 내에 있는 수많은 종교적 예술품들이 파괴되었고 벽화와 모자이크도 예외는 아니었다. 원래 기독교이든 이슬람교이든 우상 숭배는 모두 금하고 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성상과 이콘들이 종교적인 신앙심을 고취 시킬 수 있어 우상화 될 수 있었지만 관행처럼 묵인해 오고 있었다.

후에 이것이 성상파괴운동으로 변한다. 굳이 오래된 관행을 왜 이시기에 바꾸어야만 했을까?

서기 8세기에 들어와 이슬람 세력이 점점 강해져 비잔틴 제국의 해안가를 넘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끔 출현하더니 점차 정기 노선처럼 빈번해졌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런 이슬람세력이 대단히 위협적이며 강하게 보였는데 그러한 힘은 모두 이슬람의 종교적 신앙심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황제 레오 3세는 상대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신앙심이 부족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황제는 지금까지 만들어 오던 모든 성상을 파괴하도록 명한다. 현재 볼 수 있는 훌륭한 모자이크는 초기의 것이 아니라 이코노클래즘이 끝난 843년 이후의 것으로 보면 된다. 지금 남아 있는 벽 화중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이층 회랑에 있다. 이코노클래즘이 끝나고 초기는 조금 서투를 솜씨를 보여주다가 200년쯤 지난 후에는 원숙한 솜씨를 보여준다. 그 한 예는 콘스탄티누스 3세의 딸 조에의 벽화이다. 그리스도 좌우에 나란히 서서 남편은 금화 주머니를, 본인은기증서를 들고 헌납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시기가 이코노클래즘이 끝난지 1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기라 아직 거칠고 미숙한 흔적이 보인다.

또 왼편에 서있는 남편은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 모노마호스(재위1042-1055년)인데 조에는 결혼을 3번이나 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남편의 얼굴을 고친 흔적이 있다. 결국 전체적인 균형이 깨져 본인과 그리스도의 얼굴까지 고쳤다. 이런 류의 모자이크화가 여러 점 있지만 그중 제일 뛰어난 것은 남쪽 복도의 서쪽에 있는 벽화다.

중앙의 그리스도와 좌측에 성모 마리아, 우측에 세례자 요한이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얼굴 표현은 하기아 소피아성전의 모자이크중 가장 뛰어난 표현을 하고 있다. 역시 기법상 유리와 보석들로 짜여져 마치 부드러운 점묘화처럼 표현되었는데 그라데이션 표현이 뛰어나 모자이크의 표현의 한계를 훨씬 능가한다.

그 불그레한 안면 홍조는 부드러우면서도 우아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따뜻한 면을 나타내는데 손색이 없고 부드러운 미소마저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다. 아쉬운 점은 벽화의 아래 부분이 손상되어 그림이 그려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지만 그 능숙한 솜씨로 보아서 이코노클래즘이 끝나고 적어도 300여년이 지난 후 12세기 혹은 13세기라고 추측된다.

하기아 소피아 사원은 이슬람 승리의 상징

하기아 소피아내부의 모자이크 수난은 이코노클래즘시대 때에만 당한 것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이슬람의 공격에도 잘 버텨 온 비잔틴 제국은1453년 결국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간다. 오래 동안 지속되던 비잔틴 제국은 막을 내린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흐메드 2세는 하기아 소피아성전을 이슬람 사원으로 만들었다. 그러면서 하기아 소피아 성전내부는 여기저기 수리되는데 모든 내부 장식은 하얗게 칠해지고 모자이크는 회벽으로 덮이게 된다.

현재 볼 수 있는 모자이크의 모습을 다시 찾은 것은 20세기 들어와 미국인 토마스 위트모어가 회반죽을 벗겨낸 이후이다. 많은 부분이 손상되기는 했지만 이교도의 손에 파손되지 않은 것만 해도 대단히 다행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슬람의 관용정신이 돋보이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성전 2층에서 내려다보면 그 당시 고친 구조물들이 보인다. 모든 모스크에 있는 아치형 벽관, 미흐라브가 만들어졌고 그 안에는 메카의 카바 신전 방면을 알리는 키블라(Qibla)를 표시했다. 미흐라부 좌우에 초록색 원형 판이 걸려있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것은 19세기 이슬람의 저명한 서예가 ?핫타드 놋제트 에펜티?의 서예작품이다.

왼쪽은 ?알리? 오른쪽은 마호메트?의 이름이다. 우상이 금지되는 대신 문자로 장식된 예라고 할 수 있다.물론 성전 밖에는 미나레트도 만들어 졌다. 하기아 소피아 사원은 그리스 정교의 총 본산이기도 하면서 또한 이슬람의 승리의 상징이기도하다.

다음 호에는 하기아 소피아 성전 밖의 광장 히포드롬에 대해 알아보자.

그림 1) 하기아 소피아 성전 2층의 모자이크 성모마리아 : 유리. 보석. 혹은 색채가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 등을 이용한 벽화 기법은 중세미술의 백미이다. 처음에는 서툴러 거칠은 표현도 있으나 기술이 발달한 후기에 오면 표현이 섬세해지고 화려해짐.

그림 2) 그리스도와 성모마리아, 그리고 세례 요한 : 하기아 소피아 성전 내부의 모자이크 중 가장 섬세한 작품, 작품의 아래 부분이 일부 손상되어 제작 연도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작품의 정교함으로 미루어 보아 12세기나 혹은 13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측됨.

2020년 6월 5일, 1173호 2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