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르와르 강변의 고성들 (3)

쉬농소 성(Chateau de Chenonceaux)에 대하여 (1)

르와르 강변의 고성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성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샹보르 성을 떠올릴 것이다. 프랑스의 근대국가의 기반을 닦은 프랑스와 1세의 야심작이었다. 르네상스시대를 대표하는 성으로서 왕의 위엄을 당당히 세워주는 인상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을 추천한다면 르와르 강의 지류인 쉐르 강(La Cher)변에 세워진 쉬농소 성(Chateau de Chenonceaux)을 이야기 할 것이다. 쉐르 강의 잔잔한 물길위로 5개의 아치형 교각위에 사뿐히 세워진 멋진 성 <쉬농소>. 그 성에는 어떠한 유래가 있는지 알아보자.

쉬농소 성은 흔히들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 혹은 <물 위의 허공에 뜬 성> 혹은 <여섯 명의 여자 성주의 성>이라고들 이야기한다. 그 중 여자 성주 이야기는 1512년경부터 나오기 시작한다. 프랑스와 1세 시절 금융업자였던 토마 보이에(Thomas Bohier)가 중세 성채를 구입한 후에 그의 부인 까뜨린느 부리소네가 옛날에 물래 방앗간 터로 쓰였다는 몇 개의 교각 위에 르네상스 양식의 성을 축조했다. 안채(Corps de Logigs)와 우측 계단을 지은 이후 주인이 바뀌었는데 그 후에 주인 5명이 모두 여자였기 때문이다.

한편 쉬농소 성은 샹보르 성과 함께 불리워질 때 샹보르 성은 <시아버지의 성>으로 불리기도 하며 쉬농소 성은 <며느리 성>으로 기억되기도 한다. 이유는 쉬농소 성과 프랑스와 1세 의 며느리와 얽힌 사연 때문이다. 프랑스와 1세 시절, 근대 국가의 틀을 굳히던 프랑스와 1세는 차기 왕위 계승자인 왕자 앙리 2세의 왕자비로서 이탈리아의 명문가에서 며느리 감을 찾는다. 그것은 프랑스의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 확보에도 필요한 일이었다.

후보자는 당시 유럽에서 손꼽히는 금융가인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에서 거론된다. 결국 메디치 가문의 7대손인 무남독녀 외동딸 까뜨린느가 선택되고 후에 프랑스 왕위를 계승받는 앙리 2세에게 시집 온 카뜨린느는 결국 쉬농소 성의 주인이 된다. 그리고 후에 성의 주인은 바뀌어도 모두 여자였다.

쉬농소 성의 주인이 되는 여자들 중에는 프랑스 왕비도 있었고 귀족도 있었고 왕의 첩도 있었다. 그녀들 중 특히 기억할 만 한 사람은 2번째 성주와 3번째 성주다. 특히 성의 3번째 주인은 프랑스 왕 앙리 2세(Henri 2세, 1519-1559)부인으로서 왕 사후에 역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던 왕비 까뜨린느 드 메디치(1519-1589)이다.

왕가의 결혼식은 정략결혼

이탈리아 명문가 출신이며 프랑스와 1세의 며느리기도 한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 시집온 후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낸다. 시집온 직 후부터 왕실에서 이탈리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모진 대우를 받았고 남편인 왕과의 사이도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왕에게는 정부도 있었다. 처음부터 정략결혼이었던 이들 부부 사이에 애정이 있을 리 없었다. 결혼하기 전부터 왕의 연인 있었던 정부 디안느 드 프아티에는 왕이 결혼한 이후에도 관계가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왕보다 20살 연상이었다. 두 여자의 암투는 1533년 까뜨린느 드 메디치가 앙리 2세와 결혼 직후부터 이루어진다. 결혼 초부터 부인 까뜨린느는 매일 아침 정부와 함께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남편에게 문안 인사 들여야 하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결혼 후 14년째 되는 해에 남편은 디안느에게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성을 하사한다. 바로 쉬농소 성이다.

왕비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일찍 남편의 죽음을 보는 까뜨린느는 이때 받은 수모를 남편 사후에 디아느 드 푸아티에에게 고스란히 값을 기회를 갖게 된다. 왕의 사후에 왕비가 왕의 애첩이기도 하면서 이 성의 2번째 주인인 디안느 드 프아티에(Diane de Poitiers)와 성을 차지하기 위하여 투쟁했던 일은 너무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고초를 겪던 왕비는 프랑스에서 제일 강한 왕비로

르와르 강변에서 가장 여성다운 성으로 알려진 쉬농소 성(Chateau de Chenonceaux)은 실제로 대대로 성주가 여성이었다. 1600년경 왕궁이 세느 강변 르브르 궁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프랑스왕실의 제일 중요한 성중의 하나였다.

1559년 왕이 마상대회에 참여했다가 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다. 말 위에서 긴 창 대결에 참여하던 중 근위 기병대장의 창에 눈을 찔린 것이 원인이었다. 까뜨린느의 장남이 프랑스와 2세가 되고 이때부터 유명한 까뜨린느의 섭정시대가 시작된다. 복수는 시작되었다. 먼저 한 일이 쉬농소 성 되찾기였다.

쉬농소 성은 1533년 앙리2세가 까뜨린느 드 메디치와 결혼하면서부터 왕궁으로 쓰이다가 1547년 왕이 애첩인 디안느에게 성을 선사하면서 디안느의 성이 되어버렸다. 이때 정원과 아치형 교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교각 위에 이탈리아 플로렌스풍 회랑인 그랑드 갈르리(Grande Galerie, 대회랑)가 만들어 진 때는 왕 사후 까뜨린느 드 메디치 성을 디안느로부터 성을 접수 한 이후이다.(1570-1576).

성의 교각과 회랑은 모두 건축가 들로르므(Philibert Delorme)의 작품이다. 또 디안느시절 조성되었던 프랑스식 정원은 모두 이탈리아식 정원으로 바뀌었다. 이 정원은 지금도 까뜨린느 드 메디치 정원(Jardins de Catherine de Medicis)이라고 부르며 당시 왕비가 주관한 수많은 가면무도회와 호화축제의 장소로 쓰였다.

까뜨린느는 자식이 여럿 있었지만 모두 단명 한다. 쉬농소 성은 1575년 여왕의 3남인 앙리 3세(Henri 3)가 루이즈 드 로렌(Louise de Lorraine)과 결혼한 이후에도 왕궁으로 쓰였으나 왕이 죽자 왕비인 루이즈는 왕을 추도해 궁의 실내 모든 천장을 흑백으로 다시 칠했다. 그때부터 루이즈 드 로렌은 일명 <백색의 여왕>으로 불린다.

성에 도달하면 입구를 지나 숲길을 통과해 작은 다리를 건너면 좌측에 이탈리아식 정원이 펼쳐지고 정면으로 교각 위에 세워진 멋진 성이 나타난다. 플로베르(Flaubert)는 이를 <물 위의 허공에 띄운 성>으로 표현했다.

쉐르 강(Le Cher)의 잔잔한 물길 위로 5개의 아치형 교각 위에 놓인 길이 60m의 쉬농소 성은 안채(Coups de logis 입구쪽)가 매우 화려하여 당시 인테리어, 가구, 양탄자 등이 지금도 잘 보전되어있다.

다음호에도 계속해서 쉬농소 성에 대해 알아보자.

1185호 20면, 2020년 9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