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 삼원삼재(三園三齋) ③ 공재(恭齋) 윤두서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뛰어났던 6명의 화가를 삼원삼재(三園三齋)라고 표현한다.

삼원삼재(三園三齋)의 삼원은 호가 원(園)자로 끝나는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말하며, 삼재는 호가 재(齋)자로 끝나는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공재(恭齋) 윤두서를 지칭한다. 공재(恭齋) 윤두서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포함 시키기도 한다.


공재(恭齋) 윤두서: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기도 한 공재는 장남인 덕희(德熙)와 손자인 용(溶)도 화업을 계승하여 3대가 화가 가정을 이루었다.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으로서 막대한 경제적 부를 소유하였으며 윤선도와 이수광(李睟光)의 영향을 받아 학문적으로도 탄탄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에는 가풍을 이어 과거시험에 매진하였다.

1693년(숙종 19)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집안이 남인계열이었고 당쟁의 심화로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시서화로 생애를 보냈으며, 1712년 이후 만년에는 해남 연동(蓮洞)으로 귀향하여 은거하였다.

조선시대 중기와 후기의 전환기에 활동한 그는 조선중기의 화풍을 바탕으로 하여 전통성을 지니는 동시에 18세기에 등장하는 새로운 경향의 선구적 자리에 위치한다. 윤두서가 새로운 회화 경향을 선도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방대한 중국 서적의 독서 경험에서 온 것이다. 1927년부터 1928년에 걸쳐서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에서 조사하고 작성한 『해남윤씨군서목록(海南尹氏群書目錄)』에는 중국의 화보, 서화가의 문집과 이론서 등 방대한 양의 중국출판물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가 서화 학습에 얼마나 전념하였는가를 증명한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사진출처:국립문화유산포털)

그는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동물화, 화조화 등 다양한 화목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특히 말과 인물화를 잘 그렸다고 전한다. 그의 말 그림과 인물화의 특징은 예리한 관찰력과 뛰어난 필력을 바탕으로 정확한 묘사력을 구사하는 사실성에 있다. 대표작은 해남 녹우당의 종손이 소장하고 있는 「자화상(自畵像)」이다. 전신사조의 이념을 구현한 작품으로 평가되는 「자화상」을 통해 그의 심성과 인간상을 그려볼 수 있다. 자화상에 표현된 비장미는 현실과 괴리감에서 나오는 지식인의 내면적 갈등의 표현이라 할 것이다.

날카로운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주는 윤두서의 자화상은 안면의 붓질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 어두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보는 이로 하여금 양감을 느끼게 한다. 가는 선으로 처리된 수염은 안면을 보다 부각해서 예리하게 응시하듯 그려진 눈동자와 함께 강한 힘과 생기를 느끼게 하며, 거짓 없는 외모와 그의 정신세계를 솔직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동양인의 자화상으로는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해남의 종가에는 <자화상> 외에도 그의 유묵과 서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유작들은 보물 제 481호로 지정되어 있다. 종가소장 유작들 가운데에는 목기 깍는 장면을 그린 <선차도(旋車圖)>와 나물 캐는 여인을 그린 <채애도(採艾圖)> 등 풍속화가 포함되어 주목된다. 이는 김홍도(金弘道) 등에 의하여 유행하는 18세기 중·후반의 풍속화를 예시하여준 것이다. 그의 실학적 학문에 대한 취향은 그가 남긴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 일본지도(日本地圖), 천문학과 수학에 관한 서적, 그리고 이잠(李潛)·이서(李敍) 등 이익(李瀷) 형제들과의 교분이 잘 말하여준다.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산수화 일색인 조선화단에서 처음으로 서민의 실생활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풍속화에 나타난 그의 화풍은 당시로선 혁명적이었다.

일상에서 매일 보는 것을 그리는 것, 그것을 사실 그대로 ‘실뜨기’하는 것은 지금 와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지만 과거에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가능한 선구적인 행위였다.

<유하백마도>(비단에 색채, 34.3 x 44.3cm, 해남 종가 소장)

그의 화풍은 아들인 윤덕희와 손자인 윤용에게 계승되었다. 아울러 강세황, 유경종 등 근기 남인 서화가들도 그의 영향을 받았다. 조선 말기의 화가 허련(許鍊)도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에 와서 그림을 공부하면서 전통 화풍을 익혔다. 그의 사실주의적 태도와 회화관은 정약용(丁若鏞)의 회화론 형성에 바탕이 된다. 학자로서의 뚜렷한 업적은 남기지 않았지만,

풍부한 지식과 실학적 태도는 이서, 이익 형제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예 부분에서 그는 자신의 시대가 서도(書道)가 무너진 시대라고 규정하였다. 이서와 함께 서예의 정도 회복을 위하여 왕희지체를 바탕으로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창안하여 조선후기 서예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공재의 풍속화엔 해남 서민에 대한 애정을 읽어낼 수 있다. 서민들의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땀 흘려 살아내는 노동에 대한 긍정이 있었기에 진사시험에 합격한 그가 당시로선 <천한 것들>을 자신의 화폭에 담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이러한 풍속화는 김홍도를 필두로 한 조선후기 풍속화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조선은 18세기 후반 풍속화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윤두서의 풍속화는 손끝의 재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가치지향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고 그래서 그만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귀한 것이다. 다빈치가 르네상스적 인간의 전형인 팔방미인형 다재다능박식을 보여주었다면 윤두서 또한 바로 그러한 르네상스적 인간에 다름 아니다. 출중한 학문으로 과거급제, 노동하는 조선 서민들의 삶을 화폭에 담아내는 그림실력, 거기다 실학적인 탐구정신을 겸비했으니 윤두서가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라 할 수 있겠다.

1193호 23면, 2020년 11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