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세계대전 후 독일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부분이 철저히 파괴되고 왜곡되어 있었으며, 국토는 모두 파괴되다시피 했고, 패전에 오는 집단적인 열패감, 거기에 전범국이자 반인류적인 범죄국의 국민이라는 낙인으로 독일인들은 견디기 어려운 자괴감에 괴로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시기였다.
이러한 암울한 실정은 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는 영화계에 더욱 심하였다, 1933년 나치정권이후부터 영화산업은 정권홍보 수단이나 대중 사업의 일환으로 사용된 과거와 더불어, 전후 서방 점령국들의 엄격한 검열을 통한 독일 영화의 통제 그리고 미국 중심의 흥행위주의 영화의 범람 속에 향토영화(Heimatfilm) 장르이외에 독일 고유의 영화라는 것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미국 영화의 홍수 속에서 자란 일군의 젊은 감독들은 1962년 오버하우젠 영화제에서 “이제 아버지의 영화는 죽었다”며 새로운 시대가 도래함을 선언했다.
1962년 2월 28일 오버하우젠 영화제(Oberhausen Film Festival)라는 단편 영화제에 참여하였던 독일의 26명의 젊은 영화 작가들은 그 중 알렉산더 클루게(Alexander Kluge)를 중심으로 기존의 관습적인 영화 산업 구조로부터 탈피하며, 시대와 사회에 대한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기존 영화에 대한 파산선고를 내리는 “오버하우젠 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아래는 그 선언문 중 일부이다.
“이제 새로운 영화가 도래할 기회가 왔다.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독일의 단편 영화들이 토대가 되어 새로운 독일의 장편영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이 영화들은 새로운 자유를 원한다. 기존의 산업적 관심으로부터의 자유, 상업적 고려로부터의 자유, 특정 그룹의 지배로 부터의 자유를. 이제 아버지 세대의 영화는 죽었다. 우리는 새로움을 신봉한다.”
이러한 선언에 관심을 가진 연방정부는 1965년 2월 ‘청년 독일 영화 관리국(Kuratorium Junger Deutscher Film)’이라는 비영리 단체를 통해 만들어 지원하였으며, ARD, ZDF등의 TV방송국에서도 이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하게 된다. 이러한 조치는 ‘신독일영화’를 위한 돌파구가 되었다.
이러한 기존의 영화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로운 영화 만들기의 시도에 의해 국제적인 관심을 끈 좋은 작품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폴커 쉴렌도르프(Volker Schloendorf)의 <젊은 퇴를레스(Der Junge Toerless)>와 알렉산더 클루게의 <어제의 소녀 (Abschied von Gestern)>가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이 두작품이 개봉된 1966년은 ‘신독일영화’의 기점이 되었으며, 이후 ‘신독일영화’의 많은 작품들이 주요 영화제에서 수상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이 운동은 70년대에 들어서 절정을 맞게 되는데, 그 시기의 대표적인 감독으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Reiner Werner Fassbinder), 베르너 헤어조크(Werner Herzog), 폴커 쉴렌도르프, 빔 벤더스(Wim Wenders)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헤어조크는 ‘신독일영화’ 감독 중 가장 광적인 감독으로 평가된다. 특히 엘도라도를 찾아나선 스페인 군대를 통해 인간의 욕망과 광기를 그린 그의 대표작 <아귀레, 신의 분노 Aguirre, der Zorn Gottes 1973 >는 그야말로 전쟁을 하듯 남미의 정글에서 촬영되었다. 그 외의 헤어조크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피츠카랄도 Fitzcarraldo 1982>가 있다.
그리고 36세의 나이에 요절한 ‘신독일영화’의 천재 파스빈더는 독일 사회의 부조리와 편견, 그리고 파시즘을 브레히트의 소외효과와 헐리우드의 멜로 영화를 결합한 새로운 형식으로 그려냈다. 그는 13년 동안 40여편의 영화를 만든 다작으로도 유명하다.
최근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벤더스는 로드무비의 형식을 갖춘 일련의 영화들로 산업 사회속에서 소외되어가는 인간의 비극과 독일 전통에 대한 거부를 다루었고, 특히 소위 그의 로드무비 3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도시의 앨리스(Alice in den Statden 1974)>, <그릇된 행동(Falsche Bewegung 1974)>, <시간의 흐름 속에서(Im Lauf der Zeit 1975)>에서는 그들의 정신적 뿌리를 잃은 독일 젊은이들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외 그의 대표작으로는 <미국인 친구(Der Amerikanische Freund 1977)>, <파리 텍사스(Paris, Texas 1984)>, <베를린 천사의 시(Der Himmel ueber Berlin 1987)>등이 있다.
– ‘신독일영화’의 경향
‘신독일영화’는 긴밀하게 통일된 운동은 아니었지만, 광범한 형식적, 양식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독일어 사용권 국가들의 가까운 과거와 당대 상황들을 탐구하게 되면서 자연스레 사회적, 정치적 분야에 관심을 쏟았다.
파스빈더의<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Angst essen Seele auf 1974>, 클루게의<강자 페르디난트 Der starke Ferdinand 1975>, 그리고 집단 연출 작품이인 <가을의 독일 Deutschland im Herbst 1978>등은 각각 인종주의, 파시즘, 그리고 정치적 검열을 포함한 독일 전반의 상황이라는 관점에서 그 당시 독일을 치열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일련의 감독들은 극소수의 관객들을 위해 극히 실험적인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이를테면 베르너 슈뢰터(Werner Schroeter)의 <마리아 말리브란의 죽음 Der Tod der María Malibran 1971>은 유명한 가수의 삶에 대해 오페라풍의 명상을 부여했는데, 양식화된 세트, 의상 그리고 주위 환경은 표현주의적 전통을 상기시는 반면 캠프 주변의 분위기는 미국의 독립 영화 작가들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감각파’라고 일컬어지는 경향도 있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참여로부터 우울하고 시적이며 심지어는 신비스럽기까지 한 영상들은 추구한다.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 많은 ‘신독일영화’ 감독들은 외국에서 작업하거나 더욱 국제적이고 대중적인 관객을 목표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헤어조그는 <노스페라투 Nosferatu – Phantom der Nacht1979>를 미국 20세기 폭스사의 재정 지원 받아 제작했으며, 미국, 남미, 유럽 등지에서 활동의 폭을 넓혔다. 쉘렌도르프의 <양철북 Die Blechtrommel 1979>은 미국에서 상영된 가장 성공을 거둔 외국 영화 가운데 하나이다.
1982년 이들 중 가장 활동적이었던 파스빈더의 죽음과 ‘신독일영화’ 감독들이 여러 나라에 흩어져 활동하게 되면서 ‘신독일영화’ 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리게 되었다.
‘신독일영화’의 철학이나 스타일은 감독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해서 한 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려우나, 그들은 공통적으로 사회 정치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영화 속에서 그에 대한 발언을 하여 왔으며,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 프랑스의 누벨 바그(Nouvelle Vague) 운동으로 이어져 온 예술영화 운동을 계승한 ‘신독일영화‘ 운동은 영화가 산업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했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문화사업단에서는 ‘신독일영화’의 대표적 감독이라 할 수 있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폴커 쉴렌도르프, 빔 벤더스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한다.
1198호 20면, 2020년 1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