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이야기, 세상이야기 – (2)

황만섭

프랑스는 영국과 백년전쟁을(1337-1453) 116년 동안 하면서 파리에 있는 왕이 강한 군대를 가지게 되었고, 그 군대를 배경으로 얼씬만 하면 작은 나라로 갈라진 독일을 괴롭혔다.

영국과의 백년전쟁은 ‘잔 다르크’라는 프랑스 처녀장군의 출현으로 프랑스에 유리하게 전개되었고 전쟁은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다. 잔 다르크는 마녀사냥의 여론몰이에 휘말리기도 했으며, 종국엔 영국에 체포되어 사형당하게 되었지만, 역사는 잔 다르크를 영웅으로 받든다. 우리나라에서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을 ‘추 다르크’라고 부르는데 이는 ‘잔 다르크’에서 유래된 말이다.

당시 포르투갈, 에스파냐, 이탈리아, 폴란드, 프랑스는 가톨릭국가였고 교황의 권력은 왕보다 더 강했다. ‘왕은 한 나라의 주인이지만, 교황은 전세계의 주인이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차차 정치에 간섭하기 시작했고 엄청난 돈을 거둬들여 호화판 교회를 짓는 일에 몰두했다. 모금에 협조하지 않으면 ‘파문’이란 무서운 벌을 내려 모든 자격과 권리를 박탈했다. 파문은 그 당시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무서운 형벌이었고, 성직자가 휘두르는 막강한 권력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가톨릭은 차차 타락의 길로 들어섰다. 베드로성당을 짓다가 건축자금이 모자라자 면죄부판매를 시작했고, 독일의 신학자이자 신부였던 마틴 루터(1483-1546)가 비텐베르크 교회에 95개항의 테제(반박문)을 내걸고(1517년)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을 알렸다. 그의 외침은 종교개혁으로 이어졌고 세계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30년종교전쟁은 북쪽(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나라들은 신교편에 섰고, 남쪽(오스트리아 스페인 이태리)의 나라들은 구교편에 가담해 30년의 긴 세월(종교전쟁, 1618-1648) 동안 독일에서 전쟁을 했다. 이때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는 같은 가톨릭 국가이자 강대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개신교 편에 서게 되었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는 독일땅이었던 알자스, 로렌지방을 빼앗아 갔고, 독일을 350여 개의 작은 나라로 갈라 장차 힘을 못쓰게 그 싹을 잘랐다. 그 후 나폴레옹이 쳐들어와 48개(라인동맹)의 나라로 다시 정리를 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난 후의 독일은 비참했다. 전쟁의 잔혹한 잿더미 속에 독일 인구는 삼분의 일로 줄어있었고, 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자, 프랑스는 신교국가였던 네델린드와 스위스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시켜주었고, 종교전쟁 때 빼앗겼던 알자스, 로렌지방을 250여년 지난 1870년에 프러시아(비스마르크)가 다시 찾아왔지만(마지막 수업),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이 패하자, 다시 프랑스가 이 두 지방을 가져가 영원한 프랑스 땅으로 귀속시켰다.

프러시아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1620-1688)은 이웃의 작은 나라들을 정복하기 시작했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 (1712-1786)는 왕권을 더욱 강화했다.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귀족들은 도망가고 숨었으며 백성들은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쳤다. 이웃 왕국들은 자기들의 신세도 프랑스처럼 될까 걱정되어 프랑스 정부를 도와 혁명군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패했다. 1815년 나폴레옹이 물러나고 프랑스 왕이 다시 돌아온 후에도 혁명군들이 외치는 자유, 평등 박애의 불길은 전유럽에 무섭게 번졌고 왕과 귀족들은 공포에 떨었다.

이때 비스마르크가 나타나 “도이치 국민이여! 그대들은 나폴레옹에게 수모를 당한 조국의 역사를 잊었는가? 통일된 나라가 아니어서 힘을 쓰지 못해서 일어난 일들이다”라고 호소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다. 비스마르크는 드디어 1866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꺾었고, 1870년에는 프랑스를 점령했으며, 1871년 프러시아는 국가명을 ‘도이칠란트 제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제국을 역사는 ‘도이칠란트 제2제국’이라고 부른다. 우리보다 1200년이나 늦게 통일을 한 셈이다.

베르덩 조약으로 프랑스와 갈라진 후 1천 년이 자난 후에야 통일된 독일을 세운 것이다. 오랜 기간 동안 프랑스는 독일이 2류 국가 정도로 얕보았지만, 1870년 막상 독일의 공격을 받고 보니 무서운 군대라는 걸 알았다. 개, 고양이 쥐까지 잡아먹으면서 독일에 대항했어도 끝내 이기지 못하고 1871년 1월 독일군에 항복했다. 전쟁배상금으로 알자스, 로렌지방을 독일에 돌려 줄 것과 배상금으로 50억프랑을 물어낼 것 등 적힌 치욕적인 문서에 서명했다. 제1 독일 제국은 신성로마제국으로(962~1806) 군대가 없는 이름만 거창한 나라였고, 제2 독일 제국은 프로이센이라고 하는 북쪽의 조그마한 독일 민족의 나라였던 프로이센이 나타나 독일을 통일하고 오늘날의 독일이 되어 오늘날의 세계선진열강의 위치에 서게 하는 강대국을 만들었다.

1848년 5월 프랑크푸르트 있는 바울교회에서 40여 개의 독일권 나라들이 모여 국민회의를 열고 독일통일을 논의했지만, 의견만 분분하고 결정되는 것이 없이 지지부진하자, 비스마르크는 “좋다. 자본주의 민주주의가 좋기는 하지만 나중에 하자. 우선 무력으로 통일을 하고 난 다음에 생각할 일이다. 세계열강들은 세계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회의만 하면서 세월를 보낼 수는 없다”며, 비스마르크는 남몰래 전쟁준비를 했다.

1871년 뮌헨의 바이에른 왕국만 공격하지 않고 나머지 독일 여러 나라들을 무력으로 통합해 나갔고 그 결과 그는 철혈재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당시 바이에른 왕비는 베를린 프로이센 왕국의 공주였기 때문에 손대지 않았다. 1919년(3.1운동이 일어나던 해)이 되어서야 바이에른 왕국 스스로 독일연방으로 들어오게 된다.

바이에른 왕국은 오스트리아와 인척관계가 훨씬 더 많았었고, 풍습도 오스트리아와 비슷했기 때문에 바이에른 왕국이 오스트리아로 합류했다든가, 자기네들끼리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면, 독일의 형태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이어서 1918년 항구도시 킬(Kiel)에서 전쟁에 대한 불만을 가진 수병들의 폭동이 일어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났고, 독일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군과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승전국들은 빌헬름 2세를 법정에 세워 재산을 몰수하려 했지만, 네덜란드가 그의 반환을 거절했다.

빌헬름 2세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3세(1831-1888)로 왕세자로만 27년을 기다렸고, 기다리는 동안에 있었던 세 번(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할아버지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 독일 통일을 했던 사람이었고, 빌헬름 1세(1797-1888)가 90세로 죽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3세가 99일 동안 왕위에 머물다가 암으로 죽었고, 프히드리히 3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그 뒤를 이어 황제로 올랐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물어 추방당했고,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독일 왕정도 끝이 나고 말았다.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참조

먼 나라 이웃나라, 교양,

1198호 22면, 2020년 1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