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20)

프랑크푸르트(Frankfurt): 1000년 제국의 도시, 근대 독일의 탄생지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Paulskirche: 근대 독일의 탄생지

이제 우리는 프랑크푸르트대성당을 나와 근대 독일의 탄생지라 할 수 있는 파울교회(Paulskirche)로 떠난다.

대성당 앞 Braubachstrasse에서 뢰머쪽 방향으로 5분 정도 걷다보면 파울광장(Paulsplatz)을 만나게 되고, 우리의 목적지인 파울교회가 정면에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걷고 있는 Braubachstrasse에도 프랑크푸르트 근대사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거리 지명은 신도시가 아닐 경우, 특히 구시가지의 거리명은 수백 년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Braubachstrasse는 1905년에 신설된 새로운 거리명이다.

1900년 경 프랑크푸르트는 도시의 현대화에 중점을 두고 도시를 재정비하기 시작하였고,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1904년부터 1908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Franz Adickes 시장은 프랑스 파리를 모델로 하여 도시 재개발을 시행하였고, 그 가운데 구시가지인 뢰머광장의 북쪽 지역이 전차의 운행을 위해 대폭 재개발 되었다, 이 과정에서 Häuser Kranich, Peterweil, Goldenes Rad, Weiße Taube 그리고 Englischer Castorhut를 비롯한 100여채의 중시시대 건축 양식 주택들이 철거되고 새로운 거리가 조성되었다. 이 거리가 바로 Braubachstrasse이다. 오늘날 전차 11, 12, 14번이 이 거리를 지나고 있다.

이미 이지역도 120여년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어 외국인인 우리에게는 아름다운 거리로 보이기는 하지만,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에게는 도시개발에 따른 어두운 그림자를 상기하고 있다.

1883년 파울교회가 건립되다.

오늘날 파울교회 자리에는 원래 “맨발의 교회(Barfuß kirche)”라고 불렸던 교회가 자리잡고 있었다. 사료에 따르면 이 “맨발의 교회”는 1270년 경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교회로 건립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많은 보수, 개축이 있었으나 1700년대 중반부터는 예배를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낡아 프랑크푸르트는 1786년 기존의 교회를 허물고 새로운 교회를 짓기를 결정했다.

1789년에 공사를 시작한 새로운 교회는 그러나 나폴레옹의 점령으로 그 공사가 중단되었고, 나폴레옹이 물러난 뒤인 1816년 공사를 재개 1833년 5월 완공하고, 개신교 교회로, 파울교회(Paulskirche)의 이름으로 1833년 6월 9일 헌정예배를 드렸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44년 3월 18일 연합군의 프랑크푸르트 대공습으로 파울교회는 파과되었고, 전후 복구공사를 거쳐 1948년 5월 18일 “모든 독일인의 집(Haus aller Deutschen”으로 재개관하였다. 재개관 날짜는 국민의회가 1848년 5월 18일 개최되었음을 기념하기위해 국민의회 100주년 날을 선택한 것이다.

현재에는 개신교회로서가 아니라, 국민의회 관련 전시장, 국가 기념식 및 각종 행사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파울교회 속속 교인들은 뢰머광장에 있는 Alte Nikolaikirche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파울교회를 세계적인 기념지로 각인시킨 것은 184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 최초의 의회라 할 수 있는 국민의회가 바로 이곳 파울교회에서 개최된 까닭이다.

독일 최초의 의회 국민의회파울교회에서 열리다

나폴레옹의 패배후 1815년 오스트리아 주도로 유럽의 질서를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 되돌리는 ‘빈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결성된 ‘빈 체제’는 옛 신성로마제국 구성국들인 38개 개별 국가(자치 시 포함)를 독일 연방(Deutsche Bund)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이 출범시킨다. 독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어 사용국가들이 마치 신성로마제국 시절처럼 느슨하게 묶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으로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에 눈을 뜬 독일인(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이런 미완성 형태의 국가를 부정하며, 통일국가의 수립을 요구하는 외침이 점차 커져간다. 그러나 강력한 실권을 쥔 오스트리아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은 이런 외침을 외면하였고, 그 와중에 프랑스에서는 1848년 2월 혁명이 성공하여 왕정이 무너지고 다시금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고, 독일이들도 거리로 뛰어나오게 된다. 이것이 독일의 3월 혁명이다.

3월 혁명으로 인해 ‘빈 체제’의 얼굴이나 마찬가지인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는 사퇴하고, 베를린과 비엔나에서는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독일 연방은 구성국마다 국민 선거로 국회의원을 선출하여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연방의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인구수에 비례하여 선출된 의원의 수는 총 585명. 교수, 판사, 변호사 등 지식인층 중산층 위주로 선출되었다. 지역 대표가 모두 모인 국민의회가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의 St. Paulskirche에서 열리게 된다.

프랑크푸르트 시청사 뢰머에서 먼저 의장단을 선출한 뒤 축포 소리와 함께 파울교회에 입장하며 역사적인 프랑크푸르트트 국민의회가 시작된 것이다.

1년 동안 진행된 국민의회는 여런 논의 끝에 1849년 5월, 최초의 독일 헌법이 채택되었다. 이와 더불어 프랑크푸르트국민의회에서의 중요한 두 결정으로는 소독일주의와 입헌군주국 채택이었다.

통일 국가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지역으로 한정한다, 그러므로 독일어 비사용 지역의 비중이 큰 오스트리아는 통일 국가에 참여하지 않는다. 이른바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소독일주의에 입각하여 독일인의 통일 국가의 틀을 정한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센 국왕을 통일국의 황제로 추대하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다. 그러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황제 추대를 거절하였다. 결국 입헌군주제는 좌절되고, 가장 중요한 권력구조조차 정하지 못하자 국민의회는 급속도로 와해되고 만다.

그러나 22년뒤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성립된 독일제국은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소독일로, 그리고 입헌국주제 하에서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1세가 독일제국의 황제로 추대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헌법은 이렇듯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한 독일제국의 창건 시에 중요하게 반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역사상 최초의 민주주의 공화국을 실험한 바이마르 헌법과 서독 및 현재 독일 기본법의 모범이 되었다.

결국 1848년 프랑크푸르트 파울교회에 모여 좌충우돌 밀어붙인 것처럼 보였던 국민의회는 독일의 첫 의회로 근대 독일 탄생의 역할을 한 것이었다.

파울교회에서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이 재건되다

2차 대전 후 폐허가 된 라이프치히와 프랑크푸르트 모두 과거의 전통을 이으려고 했다 2차대전이 끝나기 직전 미군이 라이프치히를 점령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가 소련군 점령 지역으로 바뀌면서 라이프치히의 많은 서적 관련업체들은 미군과 함께 비스바덴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구 동독의 경우 출판의 중심지도 라이프치히에서 동베를린으로 점차 이동하여 라이프치히 도서전의 재건은 어렵게 되어갔다. 반면에 프랑크푸르트는 도서전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재기를 노력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도서전하면 라이프치히를 머리에 떠올렸고 경제도 종전 후에 어려웠기 때문에 재기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출판업자를 설득하고 프랑크푸르트 시장을 설득하여 제 1회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1949년 9월 17일에 파울 교회에서 개최한다. 물론 지금과 비교할 수없을 정도로 작은 규모다 205개 출판사가 참가하여 8400종을 전시하고 14,000명이 방문했다 독일역사상 최초로 1848년에 국민의회가 열렸던 파울 교회를 전시장으로 선정한 것은 의미 있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50년의 제 2회 도서전에는 주최측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출판사가 참가한다. 100개의 외국출판사와 360개의 독일출판사가 참가함으로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수백 년 전통을 이어 받는데 성공한다. 이로써 프랑크푸르트는 라이프치히 도서전의 그늘에서 벗어나, 세계최대 국제도서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성공을 두고 영국 출판가 스탠리 경은 1953년의 축하사에서 “프랑크푸르트의 피닉스가 라이프치히의 잿더미에서 비상했다“라고 말했다.

평화의 상 수여식은 파울교회에서 열린다

Paulskirche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 재건과 함께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평화의 상(Friedenspreis des Deutschen Buchhandels)”제정이다.

1949년 국제도서전을 재건시킨 독일 서적상 협회는 극작가이자 시인이었던 슈바르츠(Hans Schwarz) 제안으로 “ 평화와 인류애, 제 민족들의 이해”를 모토로 하여 평화의 상 재단을 설립하고, 1950년 제 2회 국제도서전 개최부터 시상하였다. 최초의 수상자는 독일계 노르웨이작가인 막스 타우(Max Tau)였다.

이 평화상은 도서전이 시작되기 직전에 파울 교회에서 수상자들에게 수여되며, 수상자에게는 출판업자와 서적 상인들의 기부금으로 형성된 25.000유로의 상금이 지급된다.

평화상 수상자들로는 알베르트 슈바이처, 마르틴 부버, 헤르만 헤세, 칼 야스퍼스, 슈바이처, 마르틴 부버, 헤르만 헤세, 칼 야스퍼스, 파울 틸리히, 에른스트 볼로흐,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 로마 클럽, 막스 프리쉬, 옥타비오 파스, 한스 요나스, 바츨라프 하벨, 위르겐 하버마스, 수잔 손탁 등이 있으며, 2020년에는 인도의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Amartya Kumar Sen가 수상하였다.

평화의 상 이외에도 괴테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며 매 3년마다 선정하는 괴테상( Goethepreis der Stadt Frankfurt am Main)도 괴테의 탄생일인 8월 28일 파울교회에서 그 수상식이 열리고 있다.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1214호 20면, 2021년 4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