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 여러 나라들이 외국에 있는 자기 나라 문화재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리스, 이집트를 위시해 아프리카, 동남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해외에 반출된 자국 문화유산의 소재지를 찾으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반환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해외 문화재 소재지를 확인하기도 하고 불법반출된 문화재의 환수 및 회복을 기하고 있다. 한국에서 현재 공식적으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 기관이 두 곳있다.
첫째, 국립기관인 <국외소재문화재단>은 문화재청 지원을 받아 상당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전세계 박물관에서 근근히 존재를 유지하는 우리 유물들을 찾아내어 전문적으로 정리, 목록도록을 작성해주기도 한다. 더욱 뜻 깊은 일은 오랜 기간 보존을 제대로 못 해 손상된 유물을 보존처리까지 맡아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과정중에 불법반출이 증명되면 환수한 예도 더러 있다.
두번째 기관은 국회산하에 있는 사립재단인 <한국문화회복재단>이다. 2018년 한국문화회복재단이 창설되었으나 그 전신의 역사는 한참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설립 이사장 이상근 대표는 젊어서부터 한국문화재 환수를 평생의 과제로 삼아 활동을 하였고 그분의 주위에는 해외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한국인들이 통신망과 정보망을 전세계에 거미줄처럼 긴밀하게 엮어 함께 활동한다. 필자 역시 이 한국문화회복재단 조직의 독일지부 고문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독일땅에서 잠자던 구한말의 조선 역사유물을 귀환시키다.
필자는 한국의 문화와 역사 일부를 역으로 독일에서 한국으로 귀한시키는 일에 크게 관여를 해왔다. 독지자들에게 현지 유럽에 고히 잠자고 있는 ‘집 주변문화재’를 찾는 방법을 알리기 위하여 몇가지 사례를 나누고 싶다.
“Ich überbringe die Korea-Liebe meines Grossvaters! (할아버지의 한국사랑을 가지고 왔습니다!)”
2006년 6월 14일 기증자인 손자가 서울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이뤄진 전시개관식에서 이렇게 인사를 했다.
독일땅 어느 집 다락방에서 긴 잠을 자던 한국 역사유물들이 비로소 긴 잠에서 깨어났다. 사연을 소개 하자면 한국 역사유물을 보관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국과 전혀 관계가 없던 상속자 손자가 할아버지의 유물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다락방에 쌓아두었었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생일모임에서 한국인을 만나면서 다락방에 가득 쌓인 조부님의 한국문화유물에 대한 가치를 알게 되었다. 그는 곧 이를 한국측에 알렸고, 한국민속박물관과 교섭이 이뤄졌다. 민속박물관은 사전조사를 마치고 첫단계로 기증전시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2005년에 국립민속박물관은 필자에게 현지에 가서 유물조사와 번역을 해달라는 청탁을 했다. 필자는 기차를 타고 낯선 도시에 내려 그 집으로 찾아갔다. 스테판 산더(Stefan Sander)씨의 할아버지( Herrman Sander) 는 부유한 집안 신분으로 1900년 대에 독일제국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중위 신분으로 Goslar라는 지방에서 복무를 했다. 지루한 군대생활을 대위로 마친 후 외교관 자리를 물색하다가 주일본독일공사관에 무보수에 전체 체류비용을 본인이 부담하는 조건으로 2005년부터 1년간 무관보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산더 대위가 일본에서 근무하던100년 전 당시, 서양 귀족신분 젊은 층 사이에서는 막 개항된 동양으로 ‘탐험’을 하는 것이 대유행이었고, 이들은 예외없이 일본 도쿄의 Imperial(제국) 호텔에 묶었다. 산더대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할일없이 놀기만 하는 서양 ‘수다쟁이’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주일본공사관에서도 따분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일본의 과장된 사교문화나 일본인들에게서 갈수록 혐오감을 느끼고 시선을 한국으로 돌렸다. 주일본독일공사의 추천으로 고종황제를 알현할 기회를 얻었는데 ‘조선’에서의 첫인상도 좋았고 한국문화에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산더대위는 조선 체류시 수많은 조선의 유물을 수집하는 한편 한국역사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그 중의 하나가 왜 ‘러일전쟁’ 에서 대제국인 러시아가 신흥제국 일본에게 대패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연구였는데 이 연구를 위해서는 먼저 전쟁의 동기가 되고 전쟁지였던 조선을 더 많이 조사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주일본 공사관 무관 자격으로 한국(조선)을 찾았다. 일본인 ‘개인비서’를 대동하여 한국에서 공적인 업무처리, 한국에 관한 도서를 수집하고 국내에서 찍은 모든 사진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다는 조건으로 업무를 수행하였다.
1906년과 1907년 3월 24일 두 차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를 알현한 후 육로로 귀국길에 오르면서 러일전쟁의 전쟁터였던 함경도 성진, 길주를 거쳐 만주, 사할린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부터 개인박물관을 세워 동양에서 수집한 문화유물을 전시하고 한국에 관한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차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장교로 근무했고, 2차전쟁 중에 그의 박물관이 소실되면서 동양미술품도 재가 되었다. 한국의 유물로는 서적, 사진, 일기 등이 남았다. 산더대위가 사망하면서 이 한국의 유물들은 아들이 다락방에 보관했다가 손자가 물려받았다.
2004년 말 손자 스테판 산더가 국립민속박물관에 기증의사를 밝히고 사진과 엽서, 보고서 등 총 유물 300여 점을 기증했는데 이 기증품 중 사진들은 근대 조선시대를 살았던 선조들의 모습과 그들의 풍속 등 역사적인 현장을 되새길 수 있는 가치가 충분하다.
산더 대위가 고국으로 돌아와서 한국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수집한 서적들은 대부분 사라져서 참으로 애석하다. 하지만 남은 한국 역사유물이 한국으로 돌아오는 뜻 깊은 일에 필자가 한 몫을 거들었다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맺음말
우리는 흔히 해외에서 ‘표류’하고 있는 한국문화재를 ‘환수하자’고 하는 주장을 듣는다. 그러나 필자는 환수보다는 ‘회복’ 이라는 표현을 쓰자고 주장한다. 환수를 주장하기 전에 사전에 알아야 할 내용이 많다. 즉, 불법반출인가? 약탈인가? 아니면 구매를 했었는가를 밝혀야 한다.
‘회복’을 기한다면 또한 두 가지 요소를 따져봐야 한다. 첫째는 해외 소재 한국유물을 찾아서 현지에 보존하면서 모국의 문화를 보여주는 것은 어떨지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둘째는 국내 환수를 위해서는 막대한 경비와 소유주 또는 소유기관과의 어려운 협상이 전재 돼야 함을 잘 알아야 한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가져가야 한다면 효율성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이 두가지를 잘 고려한 후에 현지에 남겨서 현지인들에게 우리 문화를 홍보하는 효과가 더욱 크다고 결정되면 유물의 현상을 살펴 보수를 하고 한국의 문화 위상을 당당하게 보여주는 것도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상트 오틸리언 선교수도원의 한국유물 중 국보급인 <겸재 정선의 금강산화첩>은 세계 유일한 작품이다. 환수란 단어가 필요없이 2004년 수도원에서<영구임대>라는 형식을 빌어 자발적으로 한국에 돌려줬다. 함부르그 전 민속박물관에서도 유물조사를 하던 중에 불법반출된 석상을 반환했다.
앞으로 우리의 관심을 ‘환수’에 치중하기 보다는 현지에서 찾아낸 한국의 역사사료를 현지에 보존하는 쪽으로 돌리는 것은 어떨까 제안하고 싶다. 사라진, 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사료를 찾아내어 현지에 보존하는 쪽으로 생각 해 보자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 문화에 큰 관심이 없어 해외에서 아직 재독동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한국의 문화 유물에 관심을 갖고 살펴보자는 의도로 이런 제안을 해본다. 문화유산에 큰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도 한국유물을 소중히 간수하고 아끼는 소장자들과 함께 이제부터는 귀중한 우리 문화 유산의 기증에 좀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기를 당부하며 이 글을 마친다.
1234호 10면, 2021년 9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