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최고(最古)의 도시 트리어(Trier) ①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트리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독일 각지를 여행하다보면, 많은 곳에서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을 살펴볼 수가 있고, 2000년의 도시, 1500년 역사를 지난 도시 등 각 도시는 자신의 역사를 자랑스레 전하고 있다.
특히 트리어, 쾰른, 노이스, 마인츠, 아욱스부르크 등은 고대 로마시대의 건설된 도시로 각 도시마다 2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서로 더 오래된 도시임을 주장하고 있다.
과연 어느 도시가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가?
트리어가 사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시이저의 “갈리아 전기(Bello Gallico)”에서이다. 기원전 58년부터 50년까지 시이저가 갈리아지역을 정복한 것을 서술한 “갈리아 전기”에서 당시 켈트족의 일파인 트레버러(Treverer)와의 전쟁과 승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후 기원전 30년대 트레버러 족의 반란 진압과 군사적 목적으로 트리어에 정식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또한 로마시대 건축된 이래 현재까지 트리어의 중요 다리로 사용되는 모젤강을 가로지르는 Römerbrücke의 탐사에서 기원전 17년 세워진 목축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트리어 시는 이를 기념하여 2009년 트리어 탄생 2025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네딕도 수도원의 한 수도사가 엮은 1105년 편찬된 전래 신화, 문헌, 전설 등을 엮은 책 “Gesta Treverorum”에 의해 그 역사가 2000년 정도 더 소급된다. Gesta Treverorum에 의하면 트리어는 앗시라아의 Ninus 왕에 의해 건설되었고, 그 시기는 로마건국(기원전 753년)보다 1300년 전이라 적고 있다. 이는 대략 기원전 2050년경이 된다. 이렇게 해서 트리어는 “독일 최고(最古) 도시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며,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되었다.
조금 황당한 사료 한 편에 의해 최고도시에 오른 트리어를 그러나 다른 도시들은 인정을 하지 않고 있으며, 독일 정부나 학계에서도 오래된 도시의 순위를 정확히 선정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트리어 시 곳곳에 산재한 고대 로마의 대규모 유적들은 이곳 방문객들에게 트리어를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라는 확신을 갖도록 한다.
그러면 독일의 다른 고대도시들의 시작은 어떠한지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마인츠는 라인강변의 로마군단 주둔지로 사료에 의하면 기원전 38년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노이스 역시 라인강변 로마군단 주둔지로 기원전 16년 건설되었다.
쾰른은 로마군대가 라인강을 따라 북진하면서 정복하여 노이스 보다는 그 역사가 조금 앞설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추정이나, 정식 도시로 명명된 것은 기원후 50년이다. 당시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로마황제는 자신의 부인인 아그리피나(네로의 어머니)에게 헌정하면서 “Colonia Claudia Ara Agrippinensium” 이라는 도시 명칭을 부여받았고, 쾰른이라는 도시명도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한편 아욱스부르크 도시의 기원은 기원전 15년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에 설정된 군단 주둔지가 된 데서 비롯되며, 도시의 명칭도 아우구스트 황제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 왜 트리어인가?
이렇게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로 인정된 트리어는 단순히 도시건설 연대에 의해서만 그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로마인들에 의해 건설된 트리어는, 유럽 가톨릭의 시작지였으며, 이후 중세시대에는 유럽 가톨릭의 중심지로 신성로마황제 선출권을 갖고 있는 선제후국으로, 한편으로는 시민계급의 형성과 봉건 제후와의 갈등과 타협의 현장으로, 그리고 100여년 이상 세계를 양분하다시피 한 공산주의 이론을 창시한 칼 마르크스의 탄생지이며, 유대인 박해의 대표적 도시이기도 하다.
트리어는 이렇게 2000여 년간의 역사를 생생히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유럽에서 2000년의 역사 유적을 모두 살펴볼 수 있는 도시는 아마도 로마와 더불어 트리어가 유이하지 않을까싶다.
이제 간단하게 트리어의 이러한 의미를 살펴보도록 한다.
제 2의 로마(Roma secunda)
시이저의 갈리아 전쟁으로 성립된 트리어는 이후 갈리아 지역 행정 중심지이자, 모젤강을 통한 상업의 요충지로 발달하며 기원 1세기 이미 로마인으로부터 “풍요로운 도시(urbs opulentissima”도시로 이름을 떨쳤다.
당시 트리어 는 4개의 성문과 성곽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로마도시로, 현재 남아있는 트리어의 상징인 “검은 성문(Porta Nigra)”으로 당시 도시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Porta Nigra는 우리에게도 “명상록”으로 잘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 치세에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북쪽은 Porta Nigra, 동쪽은 Porta Alba, 남쪽은 Porta Media, 서쪽으로는 Römerbrücke 가까이 Porta Inclytark 성문이 있었다. 이외에도 수천 명이 입장 가능한 3곳의 대형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기독교를 공인하여 대제라는 칭호를 받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시기에 트리어는 다시 한 번 당시 로마제국의 중심지로 발돋움 한다. 콘스탄틴 황제와 그의 자녀들의 거주지로서 트리어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의 중심지로 거듭나며 제 2의 로마(Roma secunda)라는 칭호를 얻기까지 했다.
1986년 트리어의 유적 9개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이 가운데 7개가 로마유적이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대 도시로서의 트리어의 위상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독일 기독교(가톨릭)의 시작
종교적인 면에서도 트리어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는 Euchaius, Valerius, Maternus를 알프스 이북 지역의 선교를 위해 파견하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트리어이고, 이곳에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게 된다. 이후 Euchaius는 트리어의 초대 주교가 되고, 이어 Valerius와 Maternus가 그 뒤를 잇게 된다.
이러한 전설에 기초하여, 베드로는 트리어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오늘 날까지 베드로는 트리어의 생활 전반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시장광장의 베드로 동상, 도시 문장속의 의 베드로, 심지어서는 트리어 도시 맨홀의 뚜껑에도 베드로의 형상이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사료에 나타나는 트리어 주교는 기원 314년 Agritius가 처음이다. 트리어 주교청은 이에 따라 Euchaius, Valerius, Maternus의 후임으로 Agritius(329-346) 주교를 4대 주교로 밝히고 있다.
한편 트리어 가톨릭계는 이후 오늘날 Sedisvakanz 주교까지 2000년 가까이 한 번도 궐위 시기 없이 주교가 이어왔다는 점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트리어의 초기 가톨릭을 언급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성인 Hellna이다. 아들인 콘스탄티누스가 황제에 오르자 예루살렘으로 순례길에 오르고, 예루살렘이서 예수가 마지막에 입었던 의복(성의, Heiliger Rock) 과 예수의 십자가에 박힌 못(Heilger Nagel)을 가져와 트리어 대성당에 봉헌하였다.
성인 Hellena에 대해서는 트리어 역사산책 “트리어 대성당”편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한다.
이어 가톨릭 중심의 세계였던 1000년 중세시대 트리어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주교가 제후의 역할을 하며 트리어를 통치했다. 트리어 가톨릭의 위상은 신성로마 황제 선출에서도 나타난다. 신성로마황제는 제국 전역에서도 선별된 4명의 세속 제후와 3명의 성직자 제후에게 있었는데, 트리어 주교가 바로 3명의 성직자 제후 중 한명이었다. 다른 두 성직자 제후는 마인츠와 쾰른 대주교였다.



2000년의 역사가 온전히 보존된 트리어
트리어에는 도시를 건설한 로마인들의 유적들뿐만 아니라, 이후 유럽의 모든 역사 유적들이 지나온 2000년의 세월을 방문객들에게 증거하고 있다.
로마시대 유적과, 트리어 대성당, 성모교회 등 가톨릭교회 건물 등 트리어를 대표하는 건축물 이외에도 트리어에는 지난 시대의 역사를 내보이는 다양한 유적들을 시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중세 도시의 중심 역할을 한 시장 광장에는 베드로 동상과 더불어 16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우물(Brunnen), 신성로마 황제가 시장 개설을 허용한 칙서가 새겨진 푯말, 그 옆에는 트리어 시민계층의 성장을 상징하는 Steipe 건물, 또한 대성당과 맞서 시민들의 교회로 지어진 St. Gangolf 교회 등이 있다.
구시가지에는 중세 초기의 독특한 주택형식의 건물들도 그 당시 모습 그대로 살펴볼 수가 있는데, 탑 형식의 주택이기에 탑집(Turmhaus)이라 불리는 11, 12세기 주택들을 살펴볼 수 있는데, “Dreikönighaus(1200년) Frankenturm(1100년), Turm Jerusalem(1070년 추정)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러한 주택형식은 유럽 전역에서도 몇 남지 않은 유적이라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이외에도 시내 곳곳에 자리 잡은 화려한 제후들의 궁전, 이들은 프랑스 점령으로 프랑스 장교들과 군대의 숙소, 또는 군대 행정실로 쓰인 아픔도 간직하고 있다. Kaiserthermen 근처에 위치한 제후의 궁전(Kurfürstlicher Palais)에서는 로코코양식의 대단한 화려함이 방문객들을 압도하고 있다.
트리어는 한 때 세계를 양분했던 이념인 공산주의를 창시한 칼 마르크스의 고향으로 칼 마르크스 생가가도 잘 보존되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서는 칼 마르크스의 생애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공산주의 역사도 자세히 살펴볼 수가 있다.
또한 Porta Nigra에서 멀지 않은 곳은 유대인 박해를 떠올리게 하는 유대인 게토 ‘Juden Gasse’가 그 사연으로 인해 방문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렇듯 트리어는 한 시대에 국한되지 않은 채, 2000년 유럽의 역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도시로 아마도 로마와 더불어 유이한 2000년 도시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Porta Nigra를 시작으로 트리어 역사산책을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