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30)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독일 최고(最古)의 도시 트리어(Trier)

트리어가 사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시저의 “갈리아 전기(Bello Gallico)”에서이다. 기원전 58년부터 50년까지 시저가 갈리아지역을 정복한 것을 서술한 “갈리아 전기”에서 당시 켈트족의 일파인 트레버러(Treverer)와의 전쟁과 승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후 기원전 30년대 트레버러 족의 반란 진압과 군사적 목적으로 트리어에 정식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또한 로마시대 건축된 이래 현재까지 트리어의 중요 다리로 사용되는 모젤 강을 가로지르는 Römerbrücke의 탐사에서 기원전 17년 세워진 목축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트리어 시는 이를 기념하여 2009년 트리어 탄생 2025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베네딕토 수도원의 한 수도사가 엮은 1105년 편찬된 전래 신화, 문헌, 전설 등을 엮은 책 “Gesta Treverorum”에 의해 그 역사가 2000년 정도 더 소급된다. Gesta Treverorum에 의하면 트리어는 앗시라아의 Ninus 왕에 의해 건설되었고, 그 시기는 로마건국(기원전 753년)보다 1300년 전이라 적고 있다. 이는 대략 기원전 2050년경이 된다. 이렇게 해서 트리어는 “독일 최고(最古) 도시에 대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으며,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가 되었다.

검은 성문(Porta Nigra)과 시메온 교회(Simeon Kirche) 1

이번 트리어 역사산책은 검은 성문(Porta Nigra)앞 광장에서 시작한다. 거대한 로마유적과 그에 필적하는 중세 교회, 그리고 광장 옆의 관광안내소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그리고 이곳 트리어에서 장기간 거주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념물로 가득하기에가 이곳은 트리어 도시의 특징을 종합적으로 설명해 주는 장소이다.

고대 도시로서의 입지적 조건

검은 성문을 함께 살펴보기 전에 트리어가 고대 로마의 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지리적 특성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트리어를 감싸고 흐르는 모젤강이 제 1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고대도시들이 라인강 주변이 집중 분포되어 있듯이 고대 도시는 주로 강을 끼고 발달하게 되는데, 이는 경제, 군사, 교통의 장점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운송수단이 발전하지 못했던 고대세계에서는 강은 안전하게 물자를 운송하는 통로가 되었다. 고대세계의 육로는 그 발전이 균등하게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포장되지 않은 길이 대부분이라 대량의 물품들을 수송하기에는 부적합하였고, 또한 치안확보의 어려움으로 도처에 도적들로부터 약탈을 당할 위험이 매우 높았다, 그렇기에 강을 통한 수로로 물자를 운송하는 것이 고대세계의 일반적인 형태였다.

또한 강물은 식수는 물론 농업용수로도 그 활용도가 매우 높았으며, 무엇보다도 도시를 외적으로부터 방비하는 제 1 방어선의 역할도 수행하는 기능도 갖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저는 갈리아 전쟁을 마치고 로마로 귀환하며, 로마제국의 국경을 라인강 서쪽, 도나우강의 남쪽 지역으로 확정지으며, 후대에도 이를 따르도록 하였다.

트리어의 두 번째 입지조건으로는 모젤강과 라인강 사이의 Huhnsrück 고지대이다.

로마군대는 라인강을 경계로 하여 게르만 족과 대치하고 있었는데, 로마지역 방비를 위해 마인츠와 노이스 지역에 2개 군단씩 총 4개 군단을 배치하여, 라인강변을 지키고 있었다.

마인츠와 트리어 사이의 Huhnsrück 고지대는 만일의 경우에도 게르만족의 침입을 저지할 수 있는 자연 방어벽이 되었으며, 마인츠나, 노이스 군단에 위급상황 발생 시에도 모젤강 수로를 이용, 1-2일 만에 보급물자와 충원 군대를 보낼 수 있었다.

세 번째로는 갈리아지역(오늘날 프랑스 지역)의 대 평원이다.

오늘날 파리행 ICE, 또는 TGV를 타보면 독일을 지나는 순간 대평원이 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대평원은 포장도로 건설이 용이하며, 도로공사의 달인이라 부리는 로마인들은 갈리아 지역 전역에 도로공사를 벌였고, 동부 갈리아 지역의 중심지를 평원 동쪽 끝인 트리어에 건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입지적 조건으로 트리어는 로마시대 비약적이 발전을 하게 되는데, 기원 100년경에 이미 20,000명의 인구를 보유하게 되고, 기원 300년에는 그 수가 80,000명까지 증가하게 된다. 오늘날 트리어 인구수가 대략 11만 명(2018년 통계)임을 생각해 불 때 약 2000년 전의 트리어가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지를 알 수가 있다.

트리어 고대 로마도시로 성장하다.

이제 우리는 고대 로마인들이 트리어를 어떻게 발전시켜왔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모젤강의 중요성은 위에서 입지적 조건에서 다루었지만, 그 강을 건너는 다리에 대해 잠시 알아보도록 한다.

로마인들의 건축의 국민이라 할 정도로 유럽 곳곳에 그들의 건축유적을 남기고 있다. 강을 건너는 다리공사도 예외일 수 없다.

2000년 전 로마인이 건설한 다리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다리로는 알프스 이북에서는 트리어의 Römerbrücke 유일하다.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17년 9월 23일 목조형태의 다리로 Römerbrücke가 세워졌다고 한다.

왜 목조다리였을까? 이는 로마인들의 로마 이외지역에서의 다리건설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로마는 도시국가로부터 출발하여 전쟁을 통해 세계제국으로 발전한 국가이다. 따라서 건국이래 늘 전쟁을 치렀는데, 정복지역의 강에는 먼저 간이 다리를 건조하였다. 이른바 ‘배다리’라고 알려진, 여러 배들이 늘어서 갑판 위에 튼튼한 나무로 도로형태를 만들어 군대와 물자를 강 건너편에 보내는 형식이었다. 아직 안전한 지역이 아닌 까닭에, 아군의 용도로만 쓰고, 유사시에는 각 선박으로 해체하고, 전쟁에도 동원될 수 있는 형태이다.

정복된 시간이 오래되고 안전하다고 판단되면, 로마인들은 먼저 목조로 다리를 건설하였다. 배다리보다 견고하고, 오랜 시간 사용이 가능하지만, 또한 적의 침입 등 위급 시에는 파괴하기가 용이해서 이다.

트리어에 기원전 17년 목조다리를 건설했다는 것은 로마인들은 당시까지만 해도 트리어가 군사적 용도의 도시였지, 행정도시, 광역지역 중심지로서의 도시로는 발전하지 않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목조로 지어진 트리어의 Römerbrücke가 석조다리가 건설된 것은 기원후 45년이다. 이어 142년에서 150년 사이 대대적인 재건으로 오늘 날의 Römerbrücke의 모습으로 완성되었다. 이를 통해 트리어는 기원후 100년대부터 급격히 성장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미 인구는 20,000명에 달한 시기이다.

당시 트리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트리어 주립박물관에는 트리어가 가장 번성한 인구 8만 명 시대인 기원 360/370년대의 트리어 모습을 모델로 만들어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당시 트리어는 고대 로마시대의 계획도시가 그러하듯이 정사각형 형태로 건설되었으며, 시가지 역시 구획별로 잘 정리된 도시였다. 시내 중심에는 광장(Forum)이 있고, 신전과 공중목욕탕이 외곽에 건설되었다. 오늘날에는 포룸과, 신전 등은 찾아볼 수 없고, 세 개의 공중목욕탕(Kaiserthemen, Thermen Am Viehmarkt, Barbarathermen)만이 남아있다.

도시 전체는 6,8km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는 동서남북으로 대략 1,7km의 성벽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숫자로는 명확한 이해가 어렵지만, 필자가 거주하는 인구 22만의 비스바덴시의 구시가지가 동서남북으로 약 1km 정도의 넓이임을 생각해 볼 때 그 규모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당시 트리어 는 4개의 성문과 성곽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로마도시로, 현재 남아있는 트리어의 상징인 “검은 성문(Porta Nigra)” 이외에도 북쪽은 Porta Nigra, 동쪽은 Porta Alba, 남쪽은 Porta Media, 서쪽으로는 Römerbrücke 가까이 Porta Inclytark 성문이 있었다. 또한 시내에는 44개의 원형 망루가 설치되어 있었다.

검은 성문(Porta Nigra)이 건설되다

트리어가 발전을 거듭하던 기원 2세기 중반, 142년에서 150년 사이에는 Römerbrücke가 대대적으로 재건되어 오늘 날의 모습이 되었고, 로마제국 오현제시대의 마지막 황제, 우리에게도 “명상록”으로 잘 알려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황제 치세인 기원 170년에 건축이 시작되었다.

알프스 이북에서는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로마시대 성문이다. 독일에는 레겐스부르크에도 Porta Nigra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로마 성문의 유적이 있는데, 레겐스부르크의 로마성문(Porta praetoria)은 트리어의 성문과는 달리 중세건물의 한 벽 부분에 성문이었음을 알 수 있는 형태로 보존되어 있다.

로마시대의 이 성문의 이름은 ‘검은 성문’은 아니었다. 2000년의 세월의 흔적으로 성문을 이루는 바위들의 색이 검게 변해서 ‘검은 성문’이라고 칭해졌다고 하는데, 이는 정설이 아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온존한 형태로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800년가량 교회 건물로 둘러싸려 있어 일반인들로부터의 약탈을 면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사정을 다음호에서 보다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254호 21면, 2022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