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3)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잊어서는 안 될 이유’

21세기 한민족문화포럼/한국인의 꿈 대표 최 완

헐버트는 <한국사> 마지막 장에서 “현재의 기회가 최선의 기회이며, 원하는 항구로 배를 돌리는 것은 전적으로 한국인의 몫이다” 라고 하여 한국인의 미래는 한국인에게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을 환기 시켰다.
이어서 한민족의 강점과 약점을 언급하며 “한민족은 9세기 말에 강력하게 단결한 이래 파벌간의 의견 차이는 있었으나 민족 분열을 초래할 만큼 심각한 때는 한 번도 없었다.” 라고 하며 “세 차례 대규모 침략을 비롯하여 무수한 외침을 당했으나 그 어떤 외세도 혈통의 혼합이나 언어 등에 심대한 흔적을 한반도에 남기지 못했다.”라고 하는 등, 한민족의 단결력과 생존력을 높이 평가했다.
반면 ”국가권력은 항상 우수한 인재들이 장악했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개인적 목표 추구에 권력을 사용하였다. 몇 가지 눈부신 예외가 있긴 하지만 그들은 이타적 봉사이념이 현저히 부족했다” 라고 관료들의 퇴폐의식을 비판했다.
그러나 “퇴폐에 빠진 제국이나 빈사상태에 놓인 문명의 운명을 애도 하는 것은 철학의 빈곤이다. 그들의 폐허 위에는 과거 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의 터전이 반드시 건설될 것이다”. 라며 새로운 체제와 새로운 인물을 요구했다. 그는 “역사가로서 예언자 흉내를 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민족이 장차 경이적인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며, 한민족이 장차 우뚝 설 것이라”하고 확신을 했다. 실로 오늘날의 한국을 예단한 예리한 확신에 놀라울 뿐이다.

<한국사>는 자주한국사의 출발점이 되다

헐버트의 <한국사>는 한국 최초의 온전한 한국역사 기록이다. 근대역사학의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박인식의 <한국통사>는 1915년에 출간 되었고,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훨씬 뒤였다. 계다가 헐버트는 외국인으로서 이해관계나 정파에 구애 받지 않고 객관적으로 역사를 보고 기록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더욱이 중국역사서를 뛰어넘고 일본사관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 이처럼 한민족을 중심에 두며 자주적 역사기술을 최초로 실현했다.,
비록 영문으로 쓰여지긴 했지만 <한국사>는 질과 양 면에서 한국역사의 원전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대 한국역사학의 출발점이 되었다. 20세기 초부터 서양학자들이 헐버트의 <한국사>를 통하여 한국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됨으로 해서 세계에 <한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미국인 윔스 Clarence N. Weems 교수는 1962년 <한국사>를 미국과 영국에서 <헐버트의 한국사Hulbert’s History of Korea>로 재 출판하였다. 윔스는 이 책 머리 말에서, 헐버트의 학문적 업적에 감동하여 <한국사>를 재 출간하였다며, 이 책은 서양에서 유일한 정통 한국 역사서라고 주장하였다. 국내에서도 몇 해 전에 한글로 번역되며 한국사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지은이 김동진에 의하면 헐버트의 <한국사>사관과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한 민족사관 역사학자인 박은식의 역사관과 상당한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헐버트는 유교를 사변적(思辨的)이라고 비판하면서 한민족에게 실용에 우선할 것을 주문했다. 박은식 역시 유교는 현실을 외면한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상공업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며 중국중심의 역사인식을 반대하고 자국사(自國史)를 강조 하였다
외국인들은 지금도 우리나라를 ‘은둔의 나라Hermit Nation’ 또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 Calm”라고 한다. 그러나 헐버트는 이러한 표현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조선소식> 1896년 5월호에 ‘朝鮮’의 올바른 한자 해석은, 서광이 비치는’아침햇살’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영어로 옮긴다면 ‘Morning Radiance’나 ‘Radiant Morning’ 으로 써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한국이 ‘은둔의 나라 Hermit Nation’라고 알려진 것은 미국인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1882년에 쓴 책 <은둔의 나라Hermit Nation>에서 유래 되었다. 이 책은 당시 서양에서 조선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어서 헐버트도 한국에 오기 전에 이 책을 통하여 조선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조선에 와서 생활하며 역사를 공부하며 이 책에 오류가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그린피스는 조선에 와보지도 않고 일본인이 쓴 글만 읽고 썼기 때문에 오류가 많다고 혹평하면서, 한국인들은 그저 편안히 게으름만 피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고자 동분서주하는 역동적인 민족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헐버트의 <한국사>는 한국 최초의 체계적인 한국역사기록으로, 당시 일본의 왜곡된 선전으로 잘못된 조선에 대한 역사인식을 바꾸게 하는데 크게 기여 하였다.

한민족이 문화민족임을 세계에 알리다

헐버트는 한국이 비록 극동의 작은 나라이지만 큰 나라들 틈바구니에서 굳건히 생존하여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이어왔다면서, 한민족의 발명품들을 들며 한민족이 빼어난 민족임을 설파하였다. 그는 1899년 뉴욕에서 발행되던 권위 있는 잡지 <하퍼스Harper’s New Monthly Magazine>에 한민족이 세계 최초로 발명한, 이동식 금속활자, 거북선, 현수교, 폭발탄 등 네 가지와 한글창제를 들며 세계문화사를 빛낸 다섯 가지 발명품을 세세히 소개하며, 한민족은 세계의 위대한 발명대열에 이바지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자격이 있는 민족이라고 했다.
헐버트는 먼저 조선태종(1367-1418) 시대에 이동식 금속활자가 세계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했다. 그는 “조선은 영구적이고 내구성이 강한 활자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세계 최초로 구리활자를 만들었으며, 지금도 그 활자들이 손상 없이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라고 했다. 그러나 금속활자는 고려시대인 1234년에 세계 최초로 발명되었다. 이 시기에 불교서적금속활자본인 <상정고금예문>이 인쇄 됐지만(다른 기록물에 근거함) 현재 보존되어 있지 않고 다만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체요결>이 현존하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되어 2001년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되었다. 이 전에는 독일 구텐베르그 가 1447년에 세계 최초 발명자로 오인되어 왔었다.
독일은 금속활자가 발명되어 종교개혁에 힘을 보태며 대중문화 르네상스시대를 열어갔다. 즉 1517년 마틴 루터가 카톨릭에 대한 반박문 95개 조항을 발표한 글이 무제한 인쇄되어 대중에게 알려지며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성경이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어서 성직자만 사용했던 것을 독일어로 번역하며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읽게 되었다.
독일 인쇄술 발전은 종교개혁이 성공할 수 있는 요체가 되었다. 이에 따라 기독교정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함께 인권을 존중하는 평등사회가 되며 정치, 경제, 사회도덕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민주주의 계몽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그 시점에서 위대한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음에도 한자문화등판에 서 있었던 사대부, 양반들의 거부로 한글창제 500여 년이 되도록 한글전용을 이루지 못하고 중화문화만을 숭앙해 왔다. 이 때문에 표의문자인 한자로 금속글자를 수 만개 제작하여야 했다. 그러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213년이나 뒤진 독일에 기술발전이 밀렸던 이유였을 것이다.
만약 ‘훈민정음’이 반포되면서 한글 전용이 일찍이 이루어졌다면 알파벳보다 더 간편한 한글사용 금속활자가 훨씬 더 빨리 발전하며 문화혁명을 불러 왔을 것이다.
둘째, 한국은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발명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본토지원군의 조선상륙을 막아야 할 절제절명의 냉혹한 필요성에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거북모양을 닮았다 하여)을 발명하였다고 했다. 헐버트는 “거북선은 철판으로 만든 곡선 모양의 갑판으로 덮여 있으며, 뾰족한 쇠붙이 즉, 충각ram이 설치돼 있다. 이 두 가지가 방어와 공격의 도구이다”라고 거북선 기능을 설명하며, 일본병사들은 거북선을 ‘신이 만든 배’라고 불렀다고 했다. 그러나”전쟁에 대한 압박이 사라지자마자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습성대로 철갑선을 남부해안에 녹슨 채로 방치하였다”라고 하며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고 한다.
한민족은 역사 속에서 주변국의 침략을 수 없이 받으며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마치 권력확보가 정치의 본질인양 권력암투에만 정신이 팔려 있으며 훌륭한 해양 방어무기인 거북선을 지속 발전시키지 않고 방치해 둔 것을 보며, 국가방어에는 등한이 하고 있는 정치이기 집단들의 속성을 한탄하는 헐버트 의 나무람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정황은 이미 나라가 망할 징조였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대한민국 국가현실에서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교훈이다.
나라사랑은, 개인이기주의와 집단이기주의를 초월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내가 국가이며 국가가 나라고 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국가는 나의 삶의 터전이며, 나는 국가를 형성하는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36년간 나라를 잃었던 일제 침탈시기를 기억해 보자…. 그 뿐이랴!…….
셋째, 한국은 현수교를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 현수교를 한국이 세계 최초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생소할 지 모르지만, 헐버트 는 이 사실을 세계에 소개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쫓던 조선 군과 명나라 연합군이 임진각에 도달하며 안전한 다리가 없으면 강을 건널 수 없다고 하는 명나라 군의 도강 거부에, 조선 군은 급조하여 현수교를 만들었다. 헐버트는, “급할 때는 항상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하는 조선병사들은, 칡넝쿨로 동아줄을 만들어, 나룻배를 이용하여 다리를 건설하였다.”라고 하며 한민족의 위기를 극복하는 순발력을 극찬하였다. 다리의 길이는 150야드나 되며 12만 명의 명나라 군사와 조선군사가 군사장비를 메고 현수교 를 무사히 건넸다고 했다.
그러나 거북선과 마찬가지로 이 현수교 또한 쓰임새를 다 한 뒤에는 제 하중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방치해 두었다고 지적했다.
넷째, 한국이 최초로 폭발탄을 만들었다고 했다. 헐버트에 의하면 임진왜란 첫해가 지나기 전에 조선 군은 폭발탄을 만들었다. 이 폭발탄은 몸체와 함께 성벽너머까지 날아갔다. 일본군사들이 떨어진 물건에 달려들면 폭발탄이 터지며 몸이 찢기거나 유황에 숨이 막혀 죽었다. 발명의 비법은 남아있지 않으나 그 때 쓰던 화기가 서울 남쪽을 수호하는 남한산성창고에 아직도 남아있다고 했다.
다섯째, 한국은 순수한 소리글자인 한글을 만들었음을 자랑스러워 한다고 했다. 세상 어느 문자도 따라올 수 없는 한글의 발명은 절대적인 독창성과 절대적인 과학성의 산물이라고 주장하였다. 헐버트는, 그러나 한글이 노예해방과 같은 ‘문맹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져왔음에도 한글이 주는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한국인을 안타까워했다..
이처럼 헐버트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뒤늦게나마 조선에 한글전용의 싹이 트고 있었다. 한국의 한글발전 과정을 살펴보면 1896년 서재필 등이 창간한 독립신문에 한글판을 싣고, ‘언문’을 ‘한글;’로 부르게 한 주시경을 필두로 지석영, 최현배 등이 한글전용에 앞장 섰다.
한글전용교육이 자리를 잡은 1976년에는, 월간잡지 <뿌리깊은 나무>를 창간한 한창기가 표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어휘사용 등, 한글화를 유도하며 문장을 우리말 체로 쓰기 시작했다. 이에 영향을 받으며 일반도서에 급격하게 퍼지는 추세로 각 신문들이 앞다투어 한글전용을 하며 문화적 변혁이 일어났다. 따라서 문자문화, 정치문화와 사회문화에 변혁을 가져오는 한국인의 주체적 문화의식이 급속도로 높아지게 되었다,
이어서 한국인의 특성 있는 문학작품들이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며 노벨 문학상을 겨냥하고 있다. 그리고 세계무대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는 드라마 등 모든 한류가 한글을 사용하는 문화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오늘날 경제발전과 더불어 세계현대문명의 선진국 위치에 오르게 된 것은,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하며 한민족의 영혼을 깨우친 헐버트 박사의 공이 크다.
이를 높이 평가하며 대한민국정부가 2014년 10월 09일에 한글보전과 보급에 헌신한 공로로 문화분야 최고 서훈인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함으로써 이를 증명하고 있다.
헐버트는 이상과 같이 한민족의 위대한 발명품을 소개하면서 기고문 마지막에, “이러한 위대한 발명품들은 한민족이 곤경에 처했을 때 발휘되는 발명에 대한 잠재능력을 말해 주지만… 생략… 그토록 놀라운 발명의 성과를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발명품을 사장시키고 있기 때문에 칭찬할 수 만은 없다” 고 강한 불만을 토로했다고 한다.

한국에 대한 외국인 애국자

지은이 김동진에 의하면 “만일 외국인으로서 한국에 대한 애국자가 있다면 호머 헐버트 박사보다 더 나은 이는 다시 없다”고 하며 “일생을 두고 그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고, 김동성(초대 공보처장)이 감동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헐버트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양심을 가진 휴먼이스트였다. 그는 당시 조선을 침략하여 국권을 탈취하며 국왕과 백성을 핍박하는 일본의 야욕을 용납할 수 가 없었다.
조선민족이 우수한 민족이라고 높이 평가하며 민족의 잠재력에 매료된 그는 더욱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을 지도 모른다. 목숨을 걸고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헌신한 그의 63년의 삶이 이를 말해 주고 있다.
대한제국(1897년 선포) 정부는 러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곤란한 입장을 피하기 위하여
1904년 1월 23일 중립국임을 국제사회에 선언하였으나, 일본은 감언이설로, 대한제국의 주권과 황실의 안녕을 보장하고, 한국이 독립국으로 존속할 것을 약속한다는 ‘한일의정서’를 1904년 2월23일에 교환하도록 하였다.
당시 조선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에 편입될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일의정서’에 기입된 약속을 믿고 일본이 승리하길 바라며 전쟁에서 일본을 도운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의정서의 약속을 무시하고 황실을 위협하고 백성을 핍박하는 태도로 돌변한 것이었다. 이에 두려움을 가졌던 고종황제는 ‘조미수호통상조약’과 함께 신뢰를 쌓고 있었던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이를 위하여 황제의 특사로 고종황제의 신뢰를 받고 있었던 헐버트가 미국 루즈벨트대통령에게 보낼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하는 특사로 선정되었다. 이때부터 그의 50년 한국독립투사의 삶이 시작 되었다.
고종의 친서내용은 간절했다. “러일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대한제국백성은 일본을 환영했습니다. 개혁이 이루어지고 사회환경이 개선되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개혁은 기대할 수 없으며 백성들은 속임만 당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보호통치를 강행할 때 가장 중대한 해악은, 대한제국백성은 개화를 추진해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점입니다. 주권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도 사라질 것입니다. (중략) 각하께서는 대한제국이 처한 절제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혜량 하시어 이상에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 하여 주시고, 아울러 지금까지 취해 온 외교원칙과 똑 같은 냉철함의 바탕 위에서 귀국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절박한 고종황제의 구원요청 친서를 비밀리에 루즈벨트 미국대통령에게 전해야 했던 헐버트는 안전하게 친서를 전하기 위하여 조선주재 미국공사관 공사 모건 에게, 외교행랑으로 워싱턴까지 보내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런데 이 비밀을 일본에 흘린 것이다. 이를 알게 된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할 궁리를 세워 헐버트가 워싱턴에 도착하기 전인 1905년 11월 17일에 서둘러서 소위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는 조약내용은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을 일본이 감리, 지휘하고 서울에 일본통감을 주재시킨다.”이다.
미국은, 일본이 이 불법조약을 내세우며 한국정부가 일본과 원만하게 조약을 타결했다고 하는 것을 믿으려 하며, 대한제국황제의 서신을 접수하려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국무부와 백악관을 반복해서 방문하여 고종황제의 친서를 국무부에 전달했다고 한다.
이 조약은 일본의 강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고종황제가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을사늑약’’이며 무효이다. 그러나 이미 일본입장에 서고 있는 루즈벨트는 훗날 고종황제의 친서를 읽고도 이를 공식소통으로 인정할 수 없다며, 국무부에 통보했다고 한다. 미국이 배신한 것이다. (다음에 계속)

1254호 14면, 2022년 2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