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9)

몽유도원도

안평대군이 불사한 대자암과 사라진 「몽유도원도」

대자암은 태종의 넷째아들 성녕대군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뜨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1418년 지은 절이다.

사실 지금은 성녕대군의 자취만 남아 있지만 대자암은 세종대왕과 그의 셋째아들인 안평대군과 더 긴밀한 인연이 있다.

안평은 자손이 없는 성녕의 양자로 들어가 제사를 모셨다. 성녕의 천도를 위해 지은 대자암은 안평의 주도로 불사(佛事)를 이룬다. 안평과 대자암과 관련한 실록의 기록은 「세종실록」 3건, 「문종실록」 10건에 이른다.

문종 2년 4월 5일 기사에는 “안평대군 이용(李瑢)에게 명령하여 향소(香疏)를 가지고 대자암에 가서 화엄경과 법화경을 강(講)하게 하였다”고 적혀 있다. 이후 대자암은 세종의 원찰(명복을 비는 사찰)로 자리 잡았고, 태종에서 문종에 이르기까지 왕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당시 대자암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기록으로 세종 6년(1424) 4월 5일 기사에 “고양 대자암은 원속전이 1백 52결 96복(卜)인데, 이번에 97결 4복을 더 주고, 거승은 1백 20명”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태조의 원찰인 회암사에 비교하면 규모가 작지만 합천 해인사보다 큰 규모임을 알 수있다.

이처럼 안평은 양아버지 성녕대군에서 어머니 소헌왕후와 아버지 세종에 이르기까지 대자암에서 제사를 지내고 왕실의 불사를 책임지는 역할을 도맡았다.

대자암에서 사라진 몽유도원도

안평은 1418년 9월 19일, 세종이 즉위하던 해에 태어났다. 세종의 셋째인 안평은 1453년 10월 18일, 둘째 형 수양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까지 36년 동안 많은 업적과 예술작품을 남겼다.

뛰어난 문예 수준을 갖추고 당대 최고의 지성인들과 교류하던 인맥부자 안평을 수양은 극도로 경계했다고 한다. 결국 권력을 장악한 수양은 쿠데타 성공 당일 안평을 역모로 몰아 살해하고 무계정사 등 안평의 거처에 있던 문집과 예술품 등을 모조리 태웠다. 심지어 태실마저 파괴함으로써 철저히 안평의 자취를 지우고자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안평의 며느리와 딸을 노비로 삼아 그의 후손마저 끊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듯 무자비한 세조도 선대의 명복을 비는 곳인 대자암만은 건드릴 수 없었으니 안평의 유작들은 이곳에서 생명을 부지하고 있었다.

안평과 관련된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이 「몽유도원도」이다. 「몽유도원도」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으로 안평의 꿈속 세상을 이야기로 들은 안견이 3일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회화적인 완성도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 문장가들의 글이 함께 있다는 점에서 조선 초 문화 예술의 성과가 집대성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현재 「몽유도원도」는 일본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있다. 「몽유도원도」가 어떻게 일본으로 반출되었는가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었다. 그중 사실에 가깝게 정리한 내용이 김경임의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라고 할 수 있다.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에서 김경임 선생은 「몽유도원도」가 임진왜란 때 약탈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임진왜란은 ‘문화재 약탈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군의 일부를 특수부대로 편성해 서적, 도자기, 공예미술품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각분야의 장인들을 납치했다. 당시의 피해에 대한 자료가 부족해 그 전모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세종 때 완성한 의학대백과 사전인 『의방유취』, 『삼국유사』 등의 서적과 신라 3대 범종인 ‘연지사 범종’ 등이 이때 약탈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피해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왜장들은 조선에 출병하면서 문화재 약탈을 담당할 인력을 따로 준비했는데 문서나 회화 등은 당시 조선 문물에 이해가 높은 승려들이 그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일본의 승려 가운데 막부의 지시로 외교관, 정탐, 책사의 역할 등을 수행하면서 조선과 중국을 수시로 드나들던 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문서를 식별하고 예술품을 알아보는 안목이 유달리 뛰어났다고 한다.

일본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의 시마즈 요시히로는 임진왜란 때 주로 경기 북부 지역에 주둔한 왜장이었다. 그를 수행했던 자 중에 ‘용운’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국제 정세에 밝고 조선을 잘 알고 있던 용운을 통해 시마즈 요시히로는 조선에서 약탈할 문화재 목록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을 토대로 조선 왕실의 원찰인 대자암에서 「몽유도원도」를 약탈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몽유도원도」는 1893년 일본 정부에 등록되었는데 당시 소장자는 시마즈 가문이었다. 시마즈 가문은 사쓰마번을 700여 년간 지배했다.

몽유도원도

몽유도원도가 덴리대학교로 가기까지

「몽유도원도」가 현재 보관되어 있는 덴리대학교 도서관으로 가기까지에는 파란만장한 과정이 있었다. 시마즈 가문은 1920년대 세계공황 때 파산하면서 후지타 데이조에게 「몽유도원도」를 넘겼다. 이후 가고시마의 사업가 소노다 사이지에게 매각되고, 다시 이를 도쿄의 고미술상 류센도가 구입하게 된다. 류센도는 이후 1950년에 덴리교 2대 나카야마 쇼젠 교주에게 넘기니 이것이 「몽유도원도」가 덴리대학교 도서관에 이르게 된

과정이다.

해외에서 떠돌고 있는 「몽유도원도」를 우리 품으로 되찾아 오는 것은 모두의 염원이다. 문화재가 과거에 약탈당한 사실이 밝혀지면 이후의 취득 과정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합법적인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현 국제사회의 흐름이다. 국제사회의 불법 반출 문화재의 원상회복 노력이 높아지고 있는 지금이 「몽유도원도」의 환수를 준비해야 할 때다.

사진: 몽유도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