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 /86
유럽 문명의 기원 그리스신화 (3)

그리스 신화 : 운명, 비극의 근원


유럽 문화를 관통하고 있는 두 가지 줄기 헬레니즘과 유대이즘, 즉 고대 그리스 신화는 성경과 함께 서양의 문화를 읽어내는 코드이자 일반인들에게 서양문화의 모태를 설명해 주고 있는 교과서라 할 수가 있다.
이렇듯 서양문화의 원류인 그리스 신화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상상의 세계로, 시공을 초월하는 삶의 보편적 진리와 인간의 희로애락을 촘촘하게 엮어나간 대서사시이다. 이는 유럽인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서양 문화의 원천으로 문학과 미술, 연극 등 수많은 예술작품의 창작 소재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도 그리스 신화의 이해는 유럽 역사와 문화 이해에의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은 ‘유럽문명의 기원 그리스신화’ 를 통해 그리스신화의 탄생 배경, 올림푸스 12신의 등장, 그리고 서양문화 속에 스며든 그리스신화의 그림자를 살펴보도록 한다.


세계 여러 민족의 신화 가운데 그리스 신화가 갖는 위치는 매우 독특하다. 그리스 신화는 천지개벽에서부터 신들의 탄생과 인간의 탄생, 신들의 전쟁과 대홍수 이야기, 영웅들의 모험 이야기까지 모든 유형의 신화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특정 민족의 신화가 이 모든 요소를 다 갖춘 예는 그리스 신화뿐이다. 특히 그리스 신화에는 다른 민족의 신화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운명의 이미지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모든 일이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 신이나 인간이나 주어진 운명에 거역하려 하지만 거미줄처럼 헤어나려 할수록 운명의 덫에 걸려 희생당한다. 이는 소포클레스와 아에스킬로스의 대표적인 연극에도 잘 나와있다.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테베 왕가의 비극 아가멤논을 대표로 하는 아트레우스 가의 비극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제우스마저도 이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아버지와 삼촌들인 티탄족과의 전쟁과 거인족 기간테스와의 전쟁, 그리고 무시무시한 괴물 튀폰과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제우스는 우주의 패권을 잡지만 제우스 자신 역시 가이아가 내린 저주에 의해 자식에 의해 권좌를 빼앗길 운명임을 안다. 그래서 그 운명의 비밀을 알고 있는 프로메테우스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또 트로이아 전쟁에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결투를 할 때 제우스는 심정적으로는 헥토르의 편을 들고 싶었지만 저울을 들어 운명을 시험해 본 결과 헥토르가 죽을 운명임을 알고는 하는 수 없이 헥토르를 아킬레우스 손에 죽게 내버려 둔다.

신들이 운명 앞에 이럴진대 인간의 경우는 더 말할 것 없다. 트로이 전쟁의 최대 영웅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나가지만 않으면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지만 전쟁터에 나가면 인간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얻는 대신 반드시 젊어서 죽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사랑하는 친구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의 손에 죽자 자신이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전쟁터를 향해 나간다. 그리고 운명이 정해 준 대로 파리스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더 비극적인 인물은 오이디푸스이다. 그는 아버지 라이오스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고 살 것이라는 저주를 받고 태어났다. 델포이에서 이 끔찍한 운명에 대한 신탁을 들었을 때 오이디푸스는 결코 두려워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진 운명과 맞서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자신이 부모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코린토스를 등지고 반대편에 있는 테베로 향한다. 그러나 테베야말로 바로 오이디푸스를 낳은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가 사는 곳이었다.

오이디푸스는 길에서 만난 노인을 죽이고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공으로 테베의 왕녀와 결혼하여 왕이 된다. 이렇게 하여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운명을 실현하고 만 것이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러 아폴론 신은 테베 도시에 아비를 죽이고 어미와 결혼한 패륜아를 벌하기 위해 전염병을 퍼뜨린다. 오이디푸스는 이 패륜아가 바로 자신임을 알았을 때 기구한 운명에 절규한다. 그리고 신들을 저주하며 자신의 손으로 자기 눈을 도려낸다. 신들이 자신에게 가혹한 운명을 내려 장난감처럼 우롱한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였다.

이와는 달리 끊임없이 자신의 운명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용기와 의지를 보여주는 시지포스가 있다. 가파른 산꼭대기까지 가까스로 바위를 굴려 올리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에 못이겨 다시 그 산 밑으로 굴러 떨어졌고, 산꼭대기를 향해 커다란 바윗덩이를 쉴 새 없이 밀어 올리는 고역의 주인공, 이것이 운명에 도전하는 시지포스의 모습이다.

그 비장한 시지포스의 모습에서 우리는 신화를 넘어선 인간 정신의 위대성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영웅들의 모진 운명에는 이유가 없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 가운데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인생에는 온갖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다. 인간사와 운명은 이해할 수 없다. 까닭 모를 억울한 일을 당해도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다.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리스 신화의 비극이란 단순히 슬픈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모습이 있다. 그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그리고 신화에서는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아 나가는 것을 운명을 극복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 요소는 인간이 운명의 한계를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삶 자체와 그러한 삶에 대한 인간의 동정과 연민이다.

그리스 신화의 비극에 나타난 인간의 운명은 대체로 가혹하다. 때때로 인간은 가혹한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들은 신화의 주인공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그러나 신화에 나타난 인간의 운명이 얼마나 가혹한지, 주인공이 자신의 운명을 미리 알게 되는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요소는 신화에서 인간의 운명에 대한 극복 노력을 더욱 빛나게 하는 장치에 불과하다. 결국 그리스 신화의 비극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인간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고 그러한 모습에서 인간의 위대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1261호 23면, 2022년 4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