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34)

독일 최고(最古)의 도시 트리어(Trier)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트리어의 중앙 광장(Hauptmarkt)에서 2

800여년은 위풍당당한 성문으로, 그리고 또 다른 800여년을 교회의 모습으로 트리어 구시가지 입구를 지켰던 트리어의 상징, 검은 성문(Porta Nigra). 그 기구한 역사와 함께 우리는 칼 마르크스의 흔적과 유대인 박해의 상징인 Judengasse를 살펴보았다.

이제 중세 트리어의 주 무대인 중앙광장(Hauptmarkt)으로 이동하여 중세시대 트리어를 본격적으로 경험하도록 한다. 지난 호에서는 트리어의 역사가 로마보다 1300년이나 앞섰다는 “Gesta Treverorum” 문장이 새겨진 Rotes Haus까지 살펴보았다.

Frankenturm

‘검은 성문’, ‘황제 목욕탕’, 트리어 대성 당‘ 등 알프스 이북지역에서 가장 많은 대형 로마 유적을 보유하고 있어 트리어는 ’제 2의 로마“라는 별칭을 지날 정도로 고대 로마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세시대 트리어 역시 선제후(신성로마황제 선출권을 지난 일곱 제후)의 하나 일정도로 중세 유럽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기에 다른 도시에서는 살펴볼 수 없는 귀한 중세유적들도 다수 보유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탑집(Turmhaus)’이라 불리는 거주지이다.

Frankenturm

트리어 구시가지에는 중세 초기의 독특한 주택형식인 Turmhaus 건물들도 그 당시 모습 그대로 살펴볼 수가 있는데, 이미 살펴본 “Dreikönighaus(1200년)”와 Frankenturm(1100년), Turm Jerusalem(1070년 추정)이 그 주인공들이다. 이러한 주택형식은 유럽 전역에서도 몇 남지 않은 유적이라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한다.

중앙광장 인근 Dietrichstrasse 4번지에 위치한 18m 높이의 Frankenturm은 1100년경에 지어졌으며 사료에는 약 200년 이후인 1298년에 처음 언급되고 있다.

Frankenturm의 명칭은 게르만 족의 일파인 프랑켄(Franken)족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14세기에 이 주택에 거주한 중세 기사인 Franco von Senheim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건물의 건축 형태는 로마 건축 형태를 유지하고 잇는데, 이는 1100년경에도 이곳 트리어에는 많은 로마 건물과, 6Km에 달하는 성벽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게르만 족의 침입, 노르만 족의 침입 등을 경험한 트리어는 그들의 안전을 위해 출입구가 상층에 위치한 로마시대 국경(Limes) 수비대 막사 형태를 띠게 되었다. 또한 인근 로마시대의 건물 잔해도 탑집의 건축자재로 사용되었다.

근대에 들어서는 정육점의 창고와 와인 저장소로 쓰였으나, 매우 작은 창문과, 실내 구조의 불편함으로 인해 1914년 이후에는 사용되지 않고 중세 문화유적으로만 보존되고 있다.

St. Gangolf 교회

Frankenturm에서 다시 중앙광장으로 돌아온다.

Porta Nigra에서 Judengasse를 거쳐 중앙광장으로 올 때, 정면에 대형 교회의 첨탑이 보였는데, Dietrichstrasse에서 광장으로 돌아오는데, 교회 건물은 찾을 수 가 없다.

광장 뒤편 교회가 St. Gangolf 교회이다

중앙광장(Hauptmarkt)을 둘러싼 바로크식 저택들 뒤에 St. Gangolf 교회가 그 역할을 한다. 광장의 건물들 너머에 교회가 있기 때문에 St. Gangolf 교회가 있기에, 측면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고, 광장 정면에서만 삐죽 솟은 교회의 첨탑만 보인다.

바로크 양식 가옥들의 중앙의 노란 건물 왼편에 조각으로 장식된 바로크 양식의 출입문이 보인다. 바로 이것이 St. Gangolf 교회의 입구이다. 입구로 들어가면, 주변 건물의 뒤편에 해당하는 공터가 교회의 앞뜰이 되고, 교회 첨탑 아래의 문으로 내부에 입장할 수 있다.

내부는 꽤 조촐하지만, 중앙 제단 뒤편의 큰 벽화가 눈길을 끈다. 그리고 교회의 곳곳에 다양한 장식들이 많이 있는데, 조각이나 설교단 등 화려한 장식은 없으나 특이한 모자이크 벽화 등 알차게 곳곳을 채워두고 있어 잠시 한 바퀴 둘러볼만하다.

St. Gangolf 교회는 958년에 시장교회(Marktkirche)라는 이름으로 지어져서 트리어에서는 대성당 다음으로 오래 된 교회이다. 이후 1283년부터 1344년에 교회가 다시 지어지면서 성자 간골프(St. Gangolf)에게 봉헌되어 이름이 바뀌었다. 바로크 양식의 입구 위에 “sanCtVs gangVLphVs hVIVs teMpLI patronVs et Defensor(Saint Gangolf사원의 후원자이자 수호자)”라는 문장이 장식되어 있다.

그러나 1344년 새롭게 지어진 St. Gangolf 교회는 단순한 시장교회의 개축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계급과 트리어의 종교적, 세속적 통치자인 트리어 대주교 사이의 갈등이 응축된 것으로, 트리어 시민들은 자신들을 위한 시민교회로 교회를 건축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시민들은 St. Gangolf 교회 높이를 광장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트리어 대성당 보다 높게 지었고, 이에 트리어의 Richard von Greiffenklau 대주교는 기존의 트리어 대성당 남쪽 탑 부분을 높게 개축하여 다시 “최고(最高)의 교회” 위상을 되찾았다. 원래 Richard von Greiffenklau 대주교는 다른 쪽의 탑부분도 같은 높이로 증축할 예정이었으나, 재정문제로 이를 단념하게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트리어 대성당은 엄밀한 대칭 모습을 잃고 말았다.

한편 St. Gangolf 교회는 1500년대에 후기 고딕양식으로 다시 변경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의 틀이 마련되었고, 1700년대에도 바로크 양식이 추가되어 다양한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이렇듯 Steipe, St. Gangolf, 시장 등이 위치한 중앙광장은, 대성당, 대주교 관저 등이 위치한 대성당광장(Dom Platz)과 마주보며, 시민계급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며 트리어 시민사회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중앙광장을 떠나 대성당과 성모교회가 있는 대성당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 Löwen-Apotheke

Löwen-Apotheke

중앙광장에서 대성당으로 가는 길목에서 우리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을 마나게 된다. 바로 Löwen-Apotheke이다. 사료에 따르면 1241년에 벌써 “Apotheke auf dem Graben” 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후 오늘날까지, 대성당, 수도원, 식물학자 등으로 소유주는 변경되었으나, 약국으로서의 역할은 800년 가까이 지속하고 있다.

트리어: 독일 기독교의 시작

중앙광장(Hauptmarkt)에서 우리는 이제 Sternstrasse를 통해 트리어 대성당으로 간다. Sternstrasse를 약 50m를 걸어가면 눈앞에 트리어 대성당의 모습이 나오는데, 그 위용이 참으로 대단하다. 말 그대로 “눈이 번쩍 뜨이고, 입이 벌어지며,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트리어 대성당

그런데 애초의 규모는 지금의 약 2배 정도였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트리어 대성당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최초의 로마네스코 양식의 교회건축물로도 의미가 크다. 더욱이 로마 황실 건물을 부수고 그 위에 지은 교회라는 점에서도 더욱 놀라움을 자아낸다.

트리어는 종교(기독교)적인 면에서도 트리어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는 Euchaius, Valerius, Maternus를 알프스 이북 지역의 선교를 위해 파견하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트리어이고, 이곳에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게 된다. 이후 베드로는 Euchaius를 트리어의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고, 이어 Valerius와 Maternus가 그 뒤를 이어 주교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렇듯 트리어는 유럽의 기독교 전파가 시작된 도시가 되었다.

맨홀 뚜껑 위의 베드로

이러한 전설에 기초하여, 베드로는 트리어의 수호성인이 되었고, 오늘 날까지 베드로는 트리어의 생활 전반에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시장광장의 베드로 동상, 도시 문장속의 의 베드로, 심지어서는 트리어 도시 맨홀의 뚜껑에도 베드로의 형상이 각인되어 있다.

트리어 주교청의 자료에 따르면, Euchaius, Valerius, Maternus의 후임으로 Agritius(329-346) 주교를 4대 주교로 밝히고 있으며, 이 때부터 주교 재임기간이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트리어 가톨릭계는 이후 오늘날의 Sedisvakanz 주교까지 2000년 가까이 한 번도 궐위 시기 없이 주교가 이어왔다는 점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가톨릭 중심의 세계였던 중세 1000년 동안 트리어는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된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주교가 제후의 역할을 하며 트리어를 통치했다. 트리어 가톨릭의 위상은 신성로마 황제 선출에서도 나타난다. 신성로마황제는 제국 전역에서도 선별된 4명의 세속 제후와 3명의 성직자 제후에게 있었는데, 트리어 주교가 바로 3명의 성직자 제후 중 한 명이었다. 다른 두 성직자 제후는 마인츠와 쾰른 대주교였다.

다음 호에서는 트리어 대성당과 바로 옆에 위치한 성모교회, 그리고 대성당 건너편에 위치한 Walderdorff 대저택을 살펴보도록 한다.

1262호 20면, 2022년 4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