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14)

마울브론 수도원(Klosteranlage Maulbronn)


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매주 연재한다.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아픈 역사도 갖고 있는데, 2009년 현대적 교량 건설로 인해 자연 경관이 훼손됨을 이유로 드레스덴 엘베 계곡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명된 것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제명된 첫번째 사례였다.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등재일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199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마울브론 수도원(Kloster Maulbronn)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배경이 된 수도원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마울브론은 헤세의 작품에서 <수레바퀴 아래서>뿐만 아니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마리아브론”이라는 이름으로, 그리고 <유리알 유희>에서는 “발트첼”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1147년에 건립한 시토 수도회(Ordo Cisterciensis의 마울브론 수도원은 알프스 북부 지역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중세 수도원 지구이다. 요새화된 벽 안쪽에 건축된 주요 건물은 12세기〜16세기에 건설하였다. 수도원 교회는 주로 과도기의 고딕 양식으로 지었는데, 북부와 중부 유럽 고딕 양식 건축의 전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정교한 배수 시설, 관개 수로 및 저수지 등을 갖춘 마울브론의 용수 관리 시스템은 매우 뛰어나다.

마울브론 수도원의 건축적 조화는 12세기〜16세기 시토 수도회 시기의 발달과 세속화, 개신교에서 사용하면서 받은 영향을 모두 반영하고 있다. 방어 시설에 둘러싸이고 도시 외곽에 자리한 덕분에 수도원은 도시와 명확하게 분리되어 있다.

전쟁의 피해에서 벗어나 있던 수도원 건물은 보존이 잘 되어 있다. 초창기 시토 수도회 시기와 신교 소속이 되면서 생긴 변화를 모두 갖고 있다. 2층으로 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중앙홀과 직사각형 예배당은 수도원 초창기 모습이다. 예배당, 강당, 식당, 지하 저장고, 숙소, 제분소, 진료소, 대장간까지 갖춘 자급자족형 수도원이다. 자급자족은 시토 수도회의 제1원칙이다.

교회는 전형적인 1세대 시토 수도회의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2층으로 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네이브(nave)와 직사각형 예배당이 3개 있는 낮은 트랜셉트(transept)로 연결되는 맨 안쪽 구역이 그 예이다. 수도사와 평신도는 석재 칸막이로 나뉜다.

1424년에 기존의 목조 서까래를 교체하며 만든 고딕 양식의 아치형 천장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St Bernard of Clairvaux)가 살아 있는 동안 실행한 엄격한 공간적 분화를 변형시켰다. 이는 히르사우(Hirsau) 지역의 로마네스크 양식적 전통을 금욕과 극기를 강조하는 시토 수도회의 요건에 접목한 것이다. 방어 시설은 내벽을 둔 벽으로 이루어졌는데 두 벽 사이에는 감시소가 있다.

현재 모습은 13세기〜15세기에 만들어졌다. 1424년에 천장을 고딕 양식의 아치형 천장으로 개조하였다. 수도원 별채에는 석조건물과 목조건물이 있다. 목조건물은 16세기에서 18세기에 신교 소속이 되었을 때 지은 건물이다. 르네상스 양식의 회반죽 건물은 영주의 사냥용 오두막과 마구간이다.

중심부의 기본적인 중세적 배치와 구조는 시토 수도회의 전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데, 실질적으로 완전한 상태이다. 13세기에 세운 건물들은 과도기적 양식인데, 독일에서는 이에 자극 받아 고딕 양식의 건축이 발달하였다.

한편 마울브론 수도원 지대는 시토 수도회 교단이 수리공학 분야에서 이룩한 괄목할 혁신을 보여준다. 저수지, 관개 수로, 정교한 배수구 시스템은 공동체 용수 제공, 양어장, 농지 관개 등 광범위하게 이용하였다. 수도원의 토지 보유가 세속화된 19세기 이후 이 시스템은 크게 변하여 몇몇 저수지는 배수되었고 마울브론 도시도 확장되었다.

마울부론 수도원의 역사

마울브론 수도원의 주 건물은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에서 고딕 건축 양식으로 넘어가는 때에 슈파이어의 주교 아르놀트(Arnold)에 의해 1147년 건축을 시작 1178년에 완공되었다. 그 외에 병원, 식당, 지하 저장고, 대강당, 현관, 남쪽 수도원, 강당, 공장, 기숙사, 도구창고, 그리고 예배당 등은 13세기에 뒤따라 건설되었다. 동쪽과 북쪽 그리고 서쪽수도원은 방어시설과 화장실, 숙도등으로 사용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1504년 뷔르템베르크의 울리히(Ulrich) 공작이 수도원을 점유했고, 이후 그 곳에 사냥용 오두막과 마구간을 지었다. 수도원은 첫 번째로 1519년 프란츠 폰 지킹겐(Franz von Sickingen)의 기사들에게, 그리고 6년 후 독일 농민 전쟁 등 반복적으로 약탈당했다. 1534년, 울리히 공작은 수도원을 세속화시켰지만, 시토회가 카를 5세의 아우크스부르크 가신조 협정 이후 황실의 인정을 받게 되자 다시 수도원의 통제권을 획득하였다.

1556년, 뷔르템베르크의 크리스토프(Christoph) 공작이 개신교 신학대학을 설립했고 2년 후 발렌틴 바니우스(Valentin Vannius)가 첫 수도원장이 되었는데, 요하네스 케플러는 1586년부터 1589년까지 그 곳에서 공부했다. 1630년, 수도원은 시토회에 되돌아갔고, 크리스토프 샬러 폰 젠하임(Christoph Schaller von Sennheim)이 수도원장이 되었다.

30년 전쟁 기간인 1630년에 막시밀리안(Maximilian) 황제가 마울브론 수도원을 다시 시토회에 돌려주었다. 3년 뒤에는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에 따라 개신교 건물이 되었다. 뷔르템베르크의 왕 프리드리히 1세는 1806년 교회 재산 전체를 세속화하였다. 그다음 해에 이곳은 개신교 신학교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마을부론 신학교는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횔덜린 (Friedrich Hölderlin) 등의 졸업생을 배출한 수재들만 다니던 곳이다. 이 학교를 다니면 튀빙겐 대학 입학이 보장되고 학비가 무료인 모두가 선망하는 명문 학교였다. 헤르만 헤세의 외할아버지도 이 학교 출신으로 목사였다.

1262호 31면, 2022년 4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