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
형식미의 절정, 발레 (1)

춤은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슬픔과 기쁨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삶 속에서 활동의 요구, 생명에의 욕구를 표현한 원초적 예술행위이다.
이렇듯 춤은 우리 자신들의 몸을 수단으로 삼아, 연속적인 움직임과 일정 틀, 그리고 리듬을 통해 삶에 대한 내적 욕망을 표출하는 예술인 것이다. 춤에 있어 리듬이란 생명의 규칙적인 숨결이며, 영혼의 파동으로서, 춤 속에서의 리듬은 비단 시간적인 존재만도 아니고, 공간적 인 존재 즉 시각적인 존재이다.
문화사업단에서는 르네상스 이후, 생활 속의 일상적인 행위로부터 벗어나, 무용 자체가 고도의 예술행위로 변화한 이른바 예술 무용인 발레에 대해 살펴보도록 한다.

예술무용-발레(Ballet)의 역사

발레는 유럽에서 발생한 예술무용으로 본래 유럽의 궁정과 귀족사회에서 향유되던 사교무용이었다. 최초의 발레는 13세기 이탈리아에서 탄생하였으며, 16세기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결혼하면서 프랑스 왕궁으로 전파된다.
역대 국왕의 애호를 받은 프랑스 궁정 발레는 꾸준히 발달하여 루이 13세의 뒤를 이은 루이 14세(재위 1643-1715)의 시대에 와서 대발전을 이루었다. 루이 14세는 발레의 대가로, 유명한 무용교사인 보샹에게 사사하여 20년 동안이나 매일같이 발레의 연습에 힘썼다고 한다.
그는 보샹 이외의 보캉과 페쿠르 등 뛰어난 안무가, 작곡가인 륄리를 이탈리아로부터 초청해 몰리에르가 대본을, 브랭이 의상을, 그리고 비가라니가 무대 장치를 맡는 등 모든 재능을 기울여 발레의 향상에 노력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귀족들의 아마추어적인 기예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직업적인 전문 무용가의 양성에 착안, 그 교육기관으로서 1661년에 파리에 왕립무용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1672년에 다시 음악을 추가하여 왕립음악무용학교가 되었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이어 내려오는 국립음악무용학교가 되었다. 즉 현재도 여전히 프랑스 발레나 오페라의 전당으로 되어 있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기원으로, 발레가 단순히 궁정이나 귀족 사이의 위안거리가 아니라 정식으로 국가의 인정을 받아 그 보호를 받게 된 최초의 사례로서도 무용의 역사에 큰 의의가 있다.
교장에는 륄리가 취임했으며 전임 무용 교사로서는 보샹이 임명되었다. 륄리는 이탈리아 태생의 작곡가이며 동시에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무용가이며 안무가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 오페라의 창시자였다. 한편 교사 보샹은 뛰어난 무용가인 동시에 탁월한 이론가로, 현재까지도 발레의 기법의 기초가 되고 있는 ‘다리의 다섯 가지 포지션’을 처음 만드는 공적을 세웠다.
보샹의 탁월한 직업 훈련으로 루이 14세의 뜻한 바가 훌륭하게 결실을 맺어 이 아카데미에서 잇따라 뛰어난 전문가가 나오자, 궁정 밖의 극장으로 진출하여 대중을 위한 발레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기의 발레

프랑스 혁명기는 장 조르주 노베르 등의 뛰어난 무용가와 이론가가 배출된 시대이며, 이러한 준재들에 의해서 다시 여러 개혁을 이루어 공전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프랑스 대혁명 또한 발레의 의상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발레의 의상은 궁정적인 것에서부터 더욱 자유로운 튜닉이나 가운을 본보기로 하게 되었다. 옷감의 재료를 줄이고 가볍게 했으며 그 대신에 속살이 비치는 듯한 육체의 아름다움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발레 그 자체의 발전이 한동안 답보상태에 빠졌다. 예컨대 전통적인 오페라 극장에서도 <자유에의 공헌> 등의 발레를 상연하게 되는 대신에 발레의 역으로는 종래의 왕이나 신, 영웅이나 목자들이 자취를 감추고 일반시민이나 마을사람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19세기의 발레 – 러시아로 그 중심 이동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발레는 마침내 개혁의 시기를 맞았다. 19세기 전반의 문학·미술·음악 등 모든 예술분야에서의 낭만주의 운동이 활발히 일어난 시대로서, 발레 역시 그 예외일 수 없어 당연히 그 영향의 지배를 받았다. 특히 발레 예술은 그 성격상 원래 낭만주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 시기의 로맨틱 발레는 기교와 의상면에서 많은 개혁을 했는데, 대표작으로는 라 실피드와 지젤 등이 있다.
많은 유명인에 의해서 일세를 풍미했던 로맨틱 발레도 시대가 달라짐에 따라 차차 쇠퇴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 원인으로는 오페라의 대두를 들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발레 자체가 노베르의 이론과 정신을 망각하고 매너리즘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파리의 오페라 좌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전개되었던 낭만 발레의 쇠퇴는 발레의 중심지를 러시아로 옮겨 놓았다.
러시아에 발레가 정식으로 이식된 것은 안나 이바노브나 여제(재위, 1730-1740) 시대부터였다. 여제는 프랑스의 왕실을 흉내내어 1735년에 프랑스로부터 발레 교사인 랑데를 초빙하여 수도인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에 제실무용학교를 창립했다. 이것이 러시아 아카데미로서 세계에 그 이름을 떨친 마린스키 극장이다.
그리고 또 하나,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이 개장된 것은 1825년의 일이었다. 그런데 그 후 예카테리나 2세(재위 1762-1796) 시대에 발레는 국가의 한 제도가 되어 더욱 순조로운 발전을 보게 되었으며, 1801년에는 프랑스의 발레교사 샤를 디들로가 취임함으로써 러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낭만 발레가 보급되었다.
계속해서 유명한 무희 탈리오니와 그리지가 러시아에 가서 공연했으며 안무가로서는 프랑스에서 당시 제1류의 명성을 떨친 루이 뒤포르나 페생, 생 레옹 등이 잇따라 러시아로 초빙되어 그 발전에 더욱 크게 공헌했다.
19세기 후반 발레 쇠퇴기에 홀로 전성기를 과시한 것은 러시아였다. 역대 황실의 열렬한 보호와 장려 때문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는 이 나라 발레의 2대 중심지가 되었으며, 마침내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고도의 고전 발레를 개화시키고 완성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1278호 23면, 2022년 8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