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뒤집은 남자,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 ➀
◈ 조선 찻사발이 포함된 ‘구를리트 컬렉션’
2010년 9월 22일, 스위스와 국경을 접한 지역의 독일 세관 직원이 스위스 취리히에서 들어오는 EC197 기차에서 수상쩍은 한 노인을 검문했다. 그에게서 현금 9000유로가 나왔다. 현장에서 세관 직원이 돈의 출처를 묻자 그는 “그림을 팔아 받은 돈”이라고 답했다. 이 정도 현금은 국경을 통과할 때 신고 없이 통관할 수 있는 합법적인 범위였지만 세관은 이 남성을 수상하게 여겨 상부에 현금출처가 의심스럽다고 보고했다.
당시 70대 후반의 이 노인은 코르넬리우스 구를리트. 결혼도 하지 않았던 그는 직업도, 소득 수단도 없었기에 세관 공무원들은 그가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국경 바깥에서 예술품 복제에 관여했거나 지하 시장에서 미술품 불법 거래에 개입했을 것으로 의심했다. 당국은 이런 의심을 뒷받침할 증거를 수집하고자 독일 뮌헨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았다.
2012년 2월 28일, 독일 바이에른주 아욱스부르크 검찰 직원들이 그의 아파트에 들이닥쳐 과거 그림 판매 기록을 뒤졌으나 불법 거래 장부와 같은 증거는 찾지 못했다. 목록은 오히려 세무 당국이 작성해야 했다.
이틀 동안 압수수색 영장을 집행하면서 액자에 담은 그림 121점과 액자에 넣지 않은 그림과 조각, 공예품 1258점 등 모두 1379점을 찾아 압수했다. 이런 규모의 예술품 발견은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최대여서 서방 언론들은 이를 ‘구를리트 컬렉션’ 또는 ‘구를리트 창고’ 등으로 표현하며 크게 보도했다.
독일 검찰과 세무 당국은 약 2년간 압수수색과 예술품 압류 사실을 비밀로 유지하다가 시사잡지 <포쿠스Focus>의 2013년 11월 3일자 폭로 기사로 밝혀졌다. 컬렉션에는 모네, 르누아르, 고갱, 리베르만, 쿠르베, 세잔, 뭉크, 마네, 샤갈, 피카소 등 내로라하는 대가들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어 당시 유럽이 발칵 뒤집혔다.
논란의 와중에 코르넬리우스는 독일의 대표 시사잡지 <Der Spiegel>과의 2013년 11월 17일자 인터뷰에서 “이런 예술품은 모두 아버지 힐데브란트 구를리트(Hildebrand Gurlitt, 1895~1956)에게서 합법적으로 상속받았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를리트 컬렉션의 일부는 나치가 약탈한 예술품이었기에 문제의 심각성이 더했다.
한편으로 코르넬리우스는 자신의 변호사인 크리스토프 에델(Christoph Edel)에게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아파트에 보관한 예술품들을 안전하게 숨겨달라고 부탁했다.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여서 독일 정부가 압수와 같은 강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잘츠부르크에 보관 중이던 작품은 조선의 찻사발을 포함해 254점이었다. 구를리트가 사망한 후에도 그림과 조각 등의 예술품이 추가로 발견되어 구를리트 컬렉션은 전부 1800여 점에 이른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라진 작품 발견에 세계가 ‘화들짝’
구를리트 컬렉션에서 영원히 사라진 줄 알았던 대가의 작품도 나왔다. 영국 BBC가 2014년 3월 26일에 방송한 자료를 보면 1914년에 사라진, 19세기 리얼리즘을 이끌었던 프랑스 사실주의 거장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작품 ‘장 주르네의 초상화(Portrait de Monsieur Jean Journet)’가 등장해 세계가 화들짝 놀랐다.
2014년 4월, 코르넬리우스의 변호사 에델은 검찰에 다음과 같이 합의할 것을 제안했다. 뮌헨 아파트에서 압수된 작품 가운데 아버지 구를리트가 약탈한 것으로 확인되는 작품들은 합법적 소유자들에게 돌려주자는 정부 방침에 협조하는 반면, 강탈한 작품이 아닌 것은 아들 코르넬리우스가 돌려받는 것이 조건이었다. 이 합의에 서명한 코르넬리우스는 그다음 달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그가 평생 간직했던 작품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 코르넬리우스가 눈을 감기 바로 직전, 베른시립미술관에 그의 전 재산을 기증한다는 유언을 남기면서 소유권 문제가 다시 얽히게 되었다.
◈ 사망 후에도 계속 발견 351점은 ‘퇴폐 예술’
독일 정부는 2013년 11월 구를리트 창고에서 나온 작품들의 기원과 출처 조사에 들어갔다. 5년의 조사 끝에 구를리트 출처 조사 프로젝트는 2018년 12월 조사 결과물을 웹사이트에 공개하면서 그 활동을 마쳤다.
구를리트 컬렉션의 취득 경위에 대해 최종 분류한 결과1,4 점만 약탈품으로 공식 확인되었고, 1000여 점은 나치 시대의 약탈품인지 합법적으로 구매한 것인지 불투명한 상태다. 5 00여 점은 나치 집권 이전에 구를리트 가문이 소유한 것으로, 강탈의 흔적을 전혀 찾지 못한 작품들은 베른미술관으로 넘어갔다. 앞에서 언급한 잘츠부르크에서 발견된 조선 찻사발이 포함된 구를리트 컬렉션은 그렇게 스위스 국경을 넘었다.
315점은 나치시대 독일 전역의 미술관을 대상으로 한 ‘퇴폐 예술(Entarteten Kunst)’ 추방 운동 당시 압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퇴폐 예술이 란 상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뜻하지만, 나치 시대의 퇴폐 예술은 한마디로 나치, 특히 히틀러의 마음에 들지 않은 예술품을 비하하는 용어였다.
베른시립미술관으로 넘기라는 유언에는 독일 당국이 압수하지 못한 잘츠부르크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다. 코르넬리우스 유언에는 미술관이 그림의 출처를 조사하고, 적절하게 회복하라고 명시되어 있다. 뜻밖에 횡재한 미술관은 구를리트의 합법적 소유가 확인된 작품만 받기로 결정하고, 독일과 스위스 당국 공동조사에 들어갔다.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작품들이 계속 발견되었다.
2014년 7월 뮌헨 아파트에서 그리스, 로마, 이집트, 아시아 작품들과 함께 드가의 작품과 로댕의 대리석 조각상이 나왔다. 9월에는 구를리트가 병원에서 입원 생활을 하다 남긴 여행 가방에서 모네의 초기 풍경화 한 점이 나왔다. 여차하면 병원비를 마련하거나 병원비 대신에 지급하려는 의도로,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고 다닌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는다.
1281호 30면, 2022년 9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