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그리스 신화 이야기(2)
유럽 문화를 관통하고 있는 두 가지 줄기 헬레니즘과 유대이즘, 즉 고대 그리스 신화는 성경과 함께 서양의 문화를 읽어내는 코드이자 일반인들에게 서양문화의 모태를 설명해 주고 있는 교과서라 할 수가 있다.
이렇듯 서양문화의 원류인 그리스 신화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상상의 세계로, 시공을 초월하는 삶의 보편적 진리와 인간의 희로애락을 촘촘하게 엮어나간 대서사시이다.
이는 유럽인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서양 문화의 원천으로 문학과 미술, 연극 등 수많은 예술작품의 창작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문화이야기에서는 지난해 “제우스의 변신‘이라는 주제로 제우스의 여인들을 묘사한 작품들을 소개한 바 있다.
이번 연재에서는 <안티오페>,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케팔로스와 프로크리스>, <가니메데스>를 주제로 신화와 함께 이들이 후대 미술작품에는 어떻게 나타나는 지를 살펴본다.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크레타섬의 아리아드네 공주는 영웅 테세우스와의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괴물이 된 친오빠 미로타우로스를 처치하고 미궁에서 빠져나오도록 실타래를 건네준 사랑에 눈먼 여인이다. 아리아드네는 테세우스와 같이 낙소스 섬에 왔으나 테세우스는 잔인하게도 그녀가 잠든 사이에 그대로 그녀를 남겨 두고 혼자만 귀국길에 오른다.
아리아드네는 잠을 깨어 버림받은 줄 알자 슬픔에 잠겼다. 그러나 아프로디테는 그녀를 불쌍히 여겨 그녀가 상실한 인간의 애인 대신에 신을 애인으로 내려 줄 것을 약속했다.
아리아드네가 버림받은 곳은 디오니소스가 좋아하는 낙소스 섬이었다. 아리아드네가 운명을 한탄하고 있을 때 북과 심벌즈 소리와 함께 술의 신 디오니소스가 출현하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디오니소스를 죽음의 신으로 착각한 아리아드네는 자신을 죽음의 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디오니소스에게 몸을 던졌다.
아름답고 상심에 잠긴 아리아드네를 본 순간 디오니소스의 사랑이 첫눈에 끓어오르고 둘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결혼 선물로 그녀에게 보석으로 장식된 금관을 주었다.
디오니소스는 아리아드네에게서 암펠로스(Ampelos), 스타필로스(Staphylos) 오이노피온(Oinopion)의 세 아들을 얻는다. 그리고 그녀가 죽었을 때, 그는 금관을 손에 쥐고 공중으로 던졌다. 금관이 위로 올라감에 따라 보석은 더욱 광휘를 발하여 별로 변했다. 그리고 아리아드네의 금관은 그 원형을 유지하면서 무릎을 꿇은 헤라클레스와 뱀을 쥐고 있는 그 부하 사이에 있는 별자리가 되어 하늘에 박혔다.
안니발레 카라치: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깊은 공간감과 극적인 광선을 사용한 표현력이 출중한 화가이다. 그의 작품 중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에서는 자연미를 극대화한 생동감이 잘 나타나있다. 청혼하는 남성의 밝고 역동적인 구애 동작과 등을 돌린 여인의 소극적 자세가 어색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보석이 찬란히 박혀있는 왕관으로 사랑을 고백 받는 부러움의 대상일진대, 대체 그녀의 망설임은 어디로부터 온 것일까.
그림 속에 나타난 아리아드네의 망설임은 지난 사랑의 상처가 미처 아물지 않은 채로 두 번째 사랑이 불쑥 나타났을 때의 당혹함을 담으려던 화가의 의도였는지 모른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불같은 사랑이 막을 내렸을 때, 홀로된 이들을 휘감는 지독한 외로움의 고통은 가히 죽음의 무게에 비견되곤 한다. 달콤했던 기억들과 영원 하자던 맹세들… 그런데 희한하게도 홀로된 이들은 곧 두 번째 사랑을 만난다.
카라치의 작품의 아리아드네의 망설임은 두 번째 사랑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의 표현으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가슴 깊이 묻어 두었던 지난날들을 떠올리게 한다.
티치아노 베첼리오: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
‘디오니소스와 아리아드네’는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5~1576경)가 삼십대였을 때 그린 것으로, 알폰소 데스테가 페라라에 있는 자신의 궁을 장식하기 위해 주문했던 일련의 그림 중 하나였다.
알폰소는 필로스트라투스의 ‘상상’에서 묘사된 고대 회화 갤러리에 필적할만한 공간을 가지려는 의도로 처음에는 프라 바르톨로메오와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주문했다.
하지만 이들은 작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고 결국 티치아노가 이 일을 맡게 됐다.
이 작품의 내용은 서로 다른 문학작품에서 나온 두 가지 이야기를 혼합한 것이다.
티치아노는 카툴루스의 작품에서는 버림받은 여신 아리아드네와 그녀를 찾으려는 디오니소스의 노력을, 오비디우스의 작품에서는 이 둘의 만남을 따왔다.
두 주인공의 운명적 만남과 두 인물이 대변하는 완전히 다른 두 세계가 티치아노의 색채 사용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됐다.
티치아노는 왼쪽 구석 바닥에 있는 청동 용기에서부터 시작해 전체 장면을 가로지르는 강한 사선도구를 이용해 두 세계를 분명하게 구분했다.
왼쪽 위 부분은 하늘색과 흰색으로 표현된 천상세계이고 반면에 오른쪽 아래 부분은 거친 색조로 표현된 지상세계이다.
지상세계에는 떠들썩한 술잔치가 벌어지고 그로 인한 쾌락이 반영돼 있다.
티치아노는 매혹적인 사실감과 색채의 사용이 두드러지는 그림을 창출해냈고, 움직임·에너지·상상력을 조합해 두 연인이 만나는 순간에 생생함을 불어넣었다.
1298호 23면, 2023년 1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