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포신문 문화사업단의 문화이야기

한국의 삼보사찰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를 살펴보다(3)

한국인들의 삶은 한반도에서 2000년의 역사를 지켜온 불교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왔다. 그러기에 깊은 산중의 산사(山寺)는 마음속에 잠재된 고향과도 같이 편안하고, 한번쯤은 꼭 찾아보고 싶은 존재이자 우리의 한국 여행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방문지이기도 하다.
문화사업단에서는 한국의 사찰 가운데 이른바 삼보(三寶)사찰을 살펴보며 한국 사찰의 진수를 살펴보도록 한다.

합천 해인사

합천 가야산 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해인사는 불교의 불, 법, 승 3보 가운데 법보사찰이다.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함께 법보종찰인 해인사는 우리나라 3보 사찰중 하나 이다.

해인사 장경각에는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다. 해인사는 14개의 암자와 75개의 말사를 거느린 거찰로 해인본사는 대적광전을 비롯, 승가대학, 심검당을 두고 있다.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은 빼어난 산세로 조선팔경의 하나로 손꼽힐만큼 절경이다. 특히 매표소에서부터 이어지는 홍류동 계곡의 풍치가 뛰어나다.세계문화유산 및 국보·보물 등 70여점의 유물이 산재해 있다.

이 절은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창건하였다. 신림의 제자 순응은 766년(혜공왕 2) 중국으로 구도의 길을 떠났다가 수년 뒤 귀국하여 가야산에서 정진하였으며, 802년(애장왕 3) 해인사 창건에 착수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성목태후가 불사를 도와 전지 2,500결을 하사하였다. 갑자기 순응이 죽자 이정이 그의 뒤를 이어 절을 완성하였다.

해인사의 해인은 <화엄경>중에 나오는 ‘해인삼매’에서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해인사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천명하고자 하는 뜻으로 이루어진 화엄의 대도량이다. 창건주인 순응은 의상의 법손으로서, 해인삼매에 근거를 두고 해인사라 명명하였던 사실에서 그의 창사의 이념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화엄의 철학, 화엄의 사상을 널리 펴고자 하였다. 이러한 창사의 정신은 뒷날에도 오래오래 받들어져, 고려 태조의 복전이었던 의랑이 이곳에서 화엄의 사상을 펼쳤다. 현재 해인사의 사간장경 중에 화엄의 문헌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 등도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된다.

특히, 고려의 태조는 희랑이 후백제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로 삼고 해동 제일의 도량으로 만들었다. 즉, 희랑이 후백제와의 전쟁에서 태조를 도와 승전하게 하였으므로, 태조는 전지 500결을 헌납하여 사우를 중건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는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팔만대장경판을 지천사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곳으로 옮겨옴으로써 해인사는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뒤 세조는 장경각을 확장학 개수하였으며, 1483년(성종 14) 세조의 비 정희왕후가 해인사 중건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1488년 인수왕비와 인혜왕비가 학조에게 공사를 감독할 것을 명하고 대장경판당을 중건하였다. 또한,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대적광전을 비롯하여 법당과 요사 160칸을 신축하였다.

조선시대의 불교탄압 시에 36개의 사찰만을 남겨둔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해인사는 교종 18개의 사찰 중의 하나로 남아 전답 200결과 승려 100명을 지정받았다. 또, 1902년에 원흥사를 전국의 수사찰로 정하고 전국에 16개 중법산을 두었을 때 이 절은 영남중법산으로 수사찰이 되었으며, 1911년에 전국을 31본산으로 나누었을 때 16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산이 되었다.

현재는 말사 75개와 부속암자 14개를 거느리고 있으며, 대법보사찰로서 선원ㆍ강원ㆍ율원 등을 갖춘 총림으로서 한국불교의 큰 맥을 이루고 있다.

장격각은 법보사찰 해인사의 기본 정신을 대변해주는 건물이다. 민족의 지보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해둔 2개의 판전으로서, 경판의 보관을 위한 가장 과학적이고 완전무결한 걸작으로 인정받은 건물이다. 해인사는 창건 이래 수많은 화재를 겪었으나 장경각만은 온전히 보전되어왔다.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하며, 목조지장보살 및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19평으로 1873년(고종 10)에 담화대사가 옛금찹전 자리에 신축하고, 경상남도 웅천의 성흥사에서 옮겨온 시왕상을 봉안하였다.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며, 소조 석가여래 및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23평으로 본래는 해행당이며, 1488년(성종 19) 학조대사가 초창하여 역대선사의 영정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퇴설당은 70평으로 1817년 제월대사가 건립하였고, 현재 선원으로 쓰이고 있다. 행해당은 조사전이라고도 하며 순응ㆍ이정 등 50여 조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14평으로 1899년 범운대사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본래는 희랑조사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보장전으로 이안되었다.

심검전은 관음전이라고도 하며, 목조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크기는 3동 80칸으로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현건물은 1908년 회광이 천상궁의 시주로 중건하였으며, 현재 요사로 사용되고 있다. 궁현당에는 관세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 3동 80칸으로 1407년 학조대사가 중건하였고, 1963년 해붕이 삼창하였으며, 1908년 회광이 관음전과 함께 중건하였다.

해인사를 도량으로 삼고 머물렀던 고승들 가운데 불교사를 통하여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이들로는 사명대사ㆍ선수ㆍ희언ㆍ각성 등이 있다. 그리고 사상적인 맥을 따질 때, 이 절이 화엄사찰이므로 의상대사를 비롯하여 신림ㆍ희랑 등 신라시대의 화엄의 대가들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의천ㆍ경남 등이 있고, 조선시대에는 학조ㆍ체정ㆍ유기ㆍ유일ㆍ상언ㆍ유안ㆍ성여 등 유명한 승려들이 이 절에 머물렀다. 또한, 역대 명인들과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다른 사찰들에 비하여 두드러진 점이다. 말년에 가야산에 들어와 생애를 마친 최치원이라든가 대장경 조성에 있어 전설적인 이야기를 남긴 이거인, 김정희, 그리고 홍길동으로 알려져 있는 정인홍 등은 모두 이 절과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들이다. 산내 암자중 유서가 깊거나 규모가 큰 것은 신라왕실의 원찰로 전해지는 원다암을 비롯하여, 백련암ㆍ지족암ㆍ희랑대ㆍ국일암ㆍ약수암ㆍ용탑암ㆍ삼선암ㆍ금선암 등이 있다.

1308호 23면, 2023년 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