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환보다 대여 택한 영국 ➁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약탈한 문화재와 예술품이 속속 원래의 합법적 소유자나 그 상속인들을 찾아간다. 특히 반환 문제가 제기된 예술품과 문화재 소장자가 그 취득 경위와 역대 소장자의 획득 정당성을 입증하라는 ‘워싱턴 원칙’ 합의 이후 나치 시대 약탈품의 회복이 가속화하고 있다.
약탈 문화재 환수는 유물이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는 단순한 물리적 위치 변경이나 한 나라의 컬렉션 부족 부분을 채운다는 문화적 자존심 높이기 차원을 넘어서는 문제다.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가는 제자리 찾기라는 도덕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약탈에 스며든 역사적 핏빛 폭력과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쓰다듬는 힐링의 길이다.
■ ‘왕국 실록’ 베닌 브론즈, 어떻게 유럽에 왔나
베닌 브론즈는 베닌 왕궁을 장식했던 금속 평판, 즉 동판이다. 명칭은 청동인 브론즈이지만, 성분을 분석한 결과 구리와 주석을 섞어 만든 것이 아니라 구리와 아연을 섞어 만든 황동이었다.
판에는 역대 국왕과 왕비, 모후 등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베닌 왕국은 상아, 황동, 토기, 목재에 조각을 새겨 선왕과 왕비, 모후의 제단, 왕궁 벽과 기둥 등에 걸어 장식했다. 역사적 사실이나 기념할 만한 사건들을 문자 대신에 기록하고 있어 베닌 왕국의 역사서인 실록이나 다름없다.
19세기 말까지 베닌 왕국은 독립을 유지하면서 영국과의 무역을 독점했다. 야자유와 고무, 상아 등 천연자원이 풍부한 베닌은 이런 자원을 노리는 무역상들의 표적이 되었다. 베닌 왕국은 독점 무역으로 번성했지만, 유럽 무역상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이에 1897년 현지에 진출한 영국 외교관들이 계략을 꾸며 베닌 왕국을 도발했고, 여기에 말려든 베닌 왕국은 영국인과 그들을 위해 일하던 현지인 짐꾼들에게 매복 공격을 가해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은 해리 로슨(Harry Rawson) 제독이 주도하는 군사 작전을 전개해 시가지를 불태우고, 왕국을 파괴하고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원주민들이 사망했다.
밀림으로 달아난 오본람웬(Ovonramwen, 1857?~1914) 국왕은 6개월 만에 돌아와 1897년 8월 5일 항복했다. 이로써 12세기부터 번성하던 베닌 왕국은 역사의 종말을 고하면서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왕국을 점령한 영국은 청동과 상아 조각은 물론이고 국왕과 모후 두상, 표범 박제까지 모조리 전리품으로 약탈했다. 오늘날 나이지리아에 남아 있는 베닌 유물이 불과 50여 점인 반면, 유럽과 미국의 컬렉션으로 들어간 유물은 최소 2400점에 이른다. 영국 외무성은 현지 영국군으로부터 기증받은 베닌 유물을 대규모로 팔았고, 그 결과 당시 베닌에 발을 내딛지도 않았던 독일과 미국도 상당수의 베닌 브론즈를 보유하게 되었다.
베닌 유물을 많이 소장한 대표적인 곳은 영국박물관으로 700점이 있다. 이어 베를린 민속박물관 580점, 옥스퍼드대 피트 리버스(Pitt Rivers) 박물관 327점, 빈 세계박물관 200점, 함부르크 민속박물관 196점, 드레스덴 민속박물관 182점,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163점, 펜실베이니아대학 고고인류학박물관 100점, 스톡홀름 민속박물관 43점 등의 순이다 (<모던 가나Modern Ghana>, 2020년 4월 5일자 기사).
■ 반환된 유물, 대통령이 슬쩍해 다시 영국으로
‘회복의 상징’으로 베닌 브론즈 일부가 나이지리아로 돌아간 적이 있다 .
1960년 독립한 나이지리아 정부가 반환을 요구하자 영국은 1950년부터 1972년 사이, 당시에도 가난한 나라였던 나이지리아 정부에 30점 이상을 팔았다. 영국박물관 민족지학 관리인 헤르만 브라운홀츠는 동판 203점 가운데 약 30점이 원본을 모방한 복제품이고, 박물관에 여분이 있다는 이유로 팔았다고 밝혔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4점을 1100파운드에 사들었고, 그다음 해엔 13점을 1050파운드에 매입했다. 이런 식으로 1972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 아프리카 전문가이자 인류학자 나이젤 발리(Nigel Barley) 박사는 “큐레이터의 관점에서 판매는 재앙”이라며 “베닌 브론즈는 쌍으로 조각되었고, 적절하게 전시하기 힘들었을 뿐이지 복제품은 아니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 약탈품을 해당 국가에 다시 판매한 윤리성 문제도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BBC>, 2002년 3월 27일자 기사).
문제는 나이지리아로 돌아간 베닌 브론즈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1980년 나이지리아 고대 보물전이 열렸을 때 겨우 5 점뿐이었다. 그 이전까지 영국박물관으로부터 매입한 베닌 브론즈만 해도 수십 점에 이른다. 어떻게 사라졌을까?
예컨대 1973년 영국을 방문한 나이지리아 대통령 야쿠부 고원(Yakubu Gowon) 장군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에게 베닌 브론즈 한 점을 선물했다. 복제품을 선물로 받은 줄 알았던 버킹엄 궁은 1600년대 제작된 오바(베닌 왕국의 국왕)의 두상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깜짝 놀랐다(<텔레그래프>, 2002년 9월 16일자 기사).
이런 식으로 영국이 나이지리아에 팔았던 진품이 다시 영국으로 건너온 것이다. 그 내막은 이렇다.
대통령의 영국 방문을 앞두고 나이지리아가 영국 여왕에게 선물할 베닌 브론즈를 복제했지만, 고원 대통령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시찰을 가장하고 국립 라고스박물관에 들어가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할 영국 여왕의 마음에 들 만한 진품을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라고스박물관 측은 대통령이 방문한다는 소식에 최상의 유물은 숨겼다고 주장하지만, 환수 유물의 관리 부실 책임은 피할 수가 없다. 대통령이 슬쩍한 유물은 1957년 국립 라고스박물관 개관에 맞춰 영국이 판매 형식으로 반환한 것이라 문제가 더 심각했다. 이런 상황이 드러나면서, 유물은 돌려주어도 소용없고 보전이 더욱 중요하다는 구실을 반환에 반대하는 유럽 박물관들에 제공한 셈이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반환 요구도, 그 입지도 약해졌다.
1329호 30면, 2023년 9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