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67)

독일 지성의 허브(Hub) 바이마르(Weimar) ⑫
“바이마르를 가보지 않았다면, 현재 독일의 반을 보지 못한 것이다”

바이마르를 걷는 일은 그 자체가 영광스럽다. 거리 어디에도 허투루 지어진 건축물이 없고, 이야기가 깃들여져 있지 않은 장소가 없다. 골목마다 바이마르에서 활동한 인물들의 상이 세워져 있고, 그들이 살았던 집이 보존되어 있기에 무조건 걸어야만 바이마르와 호흡할 수 있다.
바이마르의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도시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리 감각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바이마르는 이들에게 영감과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유엔이 1998년 ‘Classical Weimar’라는 이름으로 바이마르 구시가지 전체를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듯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본당이다. 괴테, 실러, 니체, 헤르더 같은 쟁쟁한 고전파들이 이 작은 도시를 유럽 문화의 중심축으로 키워냈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독일의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바이마르에 모여들었고, 그리스 사상가들이 모여든 아테네 학당을 비유, “바이마르 학당”아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다. 당시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 서너 명 중 하나는 천재라 칭해지는 인물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이마르는 독일 지성들의 집합소였다.
또한 이곳 바이마르에는 독일 민주주의가 깃들어있다. 바이마르헌법이 제정된 곳, 그러기에 독일 최초의 민주공화정인 바이마르공화국이 탄생한 도시이다.
어디 그뿐이랴, 예술을 예술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건축과 공예, 실생활에 접목시킨 바우하우스(Bauhaus)가 첫 발을 내딛은 곳도 바이마르이다.
튀링겐 주의 작은 도시 바이마르. 고전주의 대가들과 위대한 사상가들의 도시라고 불리는 곳. 유럽과 독일 철학과 예술사에 의미 있는 발자국을 남긴 이들이 오래 머물렀고, 머물고 싶어 했던 바이마르에는 지금도 그들의 영혼이 숨 쉬고 있다.

바우하우스 박물관 앞에서 바우하우스 역사를 돌아본다

지난 호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본 바이마르회의장(congress centrum weimarhalle) 바로 옆 광장인 스테판-헤셀-플라츠(Stéphane-Hessel-Platz)에는 2019년 4월 5일 개관한 바우하우스 박물관(Bauhaus Museum Weimar)가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바우하우스 박물관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세워진 바우하우스는 혁신적인 디자인 학교였다. 바우하우스는 정확히 바이마르 공화국(1919~33년)과 운명을 같이 했다.

바우하우스의 의의를 찾자면, 근대의 조형이 마주친 근본적인 문제, 즉 기술 혁신이 가져온 생산방식의 혁명적 변화를 어떠한 조형 언어로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종합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이 곧 ‘모던 디자인’이다.

물론 모던 디자인을 바우하우스가 홀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모던 디자인은 19세기 이후의 여러 가지 흐름이 20세기의 새로운 조형 운동(추상미술)과 만나면서 형성된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바우하우스라는 저수지로 흘러들어왔고 거기에서 하나로 합쳐져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바우하우스 박물관

바우하우스 창립 100주년을 맞은 2019년 4월 5일 개관한 바우하우스 박물관(Bauhaus Museum Weimar)은 건축가 Heike Hanada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디자인은 바이마르할렌파크(Weimarhallenpark) 가장자리에 기하학적으로 단순하고, 미니멀한 큐브 형식으로 지어졋다. 건물의 외관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으며 검은색 줄무늬로 가로막힌 수평 유리 밴드로 구성되어 있다.

바우하우스박물관이 이곳에 들어서자 이 지역은 Weimarhallenpark, 바이마르회의장(congress centrum weimarhalle), 신박물관( Museum Neues Weimar), 그리고 1937년에 건설된 Gauforum과 바이마르의 새로운 문화 중심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바우하우스박물관에는바우하우스 창립 멤버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리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 게르하르트 마르크스(Gerhard Marcks),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 파울 클레(Paul Klee)와 같은 바우하우스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또한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와 알마 시드호프-부셔(Alma Siedhoff-Buscher)의 작품을 포함해 바우하우스의 실무 중심 교육을 보여주는 수많은 학생 작품도 선보이고 있다.

첫 특별전은 2021년 10월 《잊혀진 바우하우스 여성, Vergessene Bauhaus-Frauen. Lebensschicksale in den 1930er und 1940er Jahren》이 열렸다. 이 특별전에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바우하우스 여성들의 삶을 조망하였다.

바우하우스(Bauhaus): 모던 디자인을 제시하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성립된 이듬해인 1919년, 아르누보(신예술)의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가 만든 ‘바이마르 공예학교’와 ‘바이마르 미술학교’가 합병되어 바우하우스가 설립되고, 초대 교장으로 발터 그로피우스가 취임하였다.

데사우 시절 바우하우스

미술과 공예, 사진, 건축 등과 관련된 종합적인 내용을 교육하는 종합조형학교로 바이마르에서 시작된 이 ‘국립 바우하우스’(Staatliches Bauhaus)는, 1925년 데사우로 옮겨지고, 1933년 나치의 정치적 압박으로 폐교되었다.

14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 존속한 바우하우스는, 그러나 당대 유럽의 창조적인 예술운동과 세계 디자인 활동의 최고 중심지가 되면서 현대 건축과 디자인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세대에 출현하는 그래픽 디자인, 내부 디자인, 공업 디자인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바우하우스는 새로운 교육이념으로 운영되었는데, ‘사회 지향적 체계’를 바탕으로 ‘예술가들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 하였다. 이러한 교육 이념을 바탕으로 건축과 산업에 있어서 보다 창의적이면서도 실용적인 제품 또는 작품을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교육이념에 의해 바우하우스의 건축물과 공예작품들은 청교도주의적인 단순하고 검소한 제품을 선호하게 되고 값싸게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사각형 형태의 디자인 제품들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

그로피우스는 바우하우스의 역사적인 배경과 근본취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일반적으로 바우하우스의 역사를 시대적인 특성에 따라 4기로 구분한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시대로서 수공예가를 양성하기 위한 일반적인 공예학교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데사우로 이전한 이후 1925년부터 1927년 까지는 산업 전반에 디자인적 관점과 해결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현대의 디자인 대학 형태를 갖추었다.

한네스 마이어(Hannes Meyer)가 교장으로 있던, 1928년부터 1929년까지의 기간 동안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에 놓이게 되고, 그는 결국 시 정부에 의해 해임된다. 마지막 시기는, 건축가인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 (Ludwig Mies van der Rohe)의 시대로 건축공과대학 정도로 그 규모와 역할이 축소되어 다시 탄생되는데 1930년부터 1933년까지가 이 기간에 해당한다.

바이마르에서 출발한 바우하우스에서는 요하네스 이텐 (Johannes Itten), 라이오넬 파이닝거 (Lyonel Feininger), 파울 클레 (Paul Klee), 오스카 슐레머 (Oskar Schlemmer), 바실리 칸딘스키 (Wassily Kandinsky) 등 신예 예술가들이 초빙되어, 공업과 예술을 결합시켜 새로운 건축과 새로운 공예를 만드는 연구가 시도되었다.

초기에는 공예학교 성격을 띠다가 1923년에 이르러서야 예술과 기술의 통일이라는 연구 성과를 평가받기 시작하였다.

1925년에는 경제적 불황과 우파의 출현, 정부의 압박 등으로 폐쇄 위기에 처했으나 데사우시(市)의 주선으로 시립 바우하우스로 재출발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데사우 시기로 부른다.

이 시기부터는 이미 종합적 안목을 갖춘 인재를 육성하였기 때문에 각 공방에서 3년의 과정을 마친 다음에는 모든 것을 통괄하는 건축과정으로 넘어갔다. 바이마르 시절의 졸업생들이 교수진으로 참여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생산방식에 따른 디자인 방식의 도입은 물론, 공업화를 추구해 실제로 산업계와 제휴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26년 그로피우스가 설계한 교사(校舍)로, 공업시대 특유의 구조와 기능미가 잘 나타난다. 그리고 1925년부터 《바우하우스 총서》 14권을 간행하여 디자인 사고의 형성에도 기여한다.

1928년 그로피우스가 떠난 뒤에는 스위스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바우하우스는 다시 한 번 그 성격을 바꾸게 된다. 마이어는 바우하우스의 형식주의적인 면을 공격하고, 일반인에 대한 봉사야말로 디자인의 역할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건축이 모든 의미의 미적 과정이라고 역설하였다.

1930년 마이어가 데사우시와 관계가 좋지 못하여 바우하우스를 떠난 후에는 미스 반 데어 로에가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32년 나치의 탄압으로 데사우에서 쫓겨나면서도 베를린에 사립 바우하우스를 설립하였으나 1933년 나치정부는 이마저도 완전히 폐쇄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망명 교사나 졸업생들이 그 명맥을 계속 이어 나갔으며, 1955년에는 바우하우스 졸업생 막스 빌(Max Bill)이 다시 울름조형대학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영향

그로피우스가 건축한 데사우의 바우하우스 건물은 그동안 유럽과 독일에서 일반적으로 지어졌던 뾰족한 지붕의 전통적인 건물들과 달리 비대칭적인 평면 구성과 평평한 지붕, 흰색으로 칠한 벽, 길쪽으로 나 있는 수평적인 창문 등이 당시의 건축 문화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독일의 우파 정치인들과 나치스에게는 전통적 독일의 건축 양식을 거스르는 반동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바우하우스 양식은 오늘날 우리의 주변의 일반 건축물들과 비교해 본다면 무엇이 뛰어나고 혁명적인지 알기 어렵지만 그 전 시대의 모습과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알 수 있다. 바로크 시대의 건축물만 살펴보더라도 웅장하고 사치스러운 장식들이 건물을 온통 치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우하우스가 계획했던 건축물의 모습은 기능적인 것 외에 고전적인 건축물처럼 볼거리가 많지 않아 평범하고 각진 건축물들이 볼품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집과 대부분의 건축물이 바우하우스 건축물의 모습과 유사한 것을 본다면, 오랜 기간 동안 공들이고 많은 재정이 소요되는 바로크 양식을 따른 건축물보다 저렴한 건축비와 실용성, 그리고 그 짧은 건축기간으로 더 많은 일반인들에게 제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바우하우스의 건축은 가히 시대를 바꾸는 혁명적 양식이라 할 수가 있다.

현대의 건축물들이 모던 양식을 토대로 지어지는데, 그 시초가 바우하우스라고 말하게 된 이유는 그 만큼 군더더기를 없앤 기능 중심의 원형만이 강조되는 건축양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여러 방면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바우하우스에서 계획되거나 실행된 건축물과 디자인, 그리고 실용 제품들은 널리 모방되었으며, 일상생활에 쓸 여러 가지 물품들을 편리하고 수수하게 설계하는 것이 널리 보급되었던 것은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개념과 모형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교수법과 교육이념은 전세계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보급되었는데, 오늘날 대부분의 예술 교육과정에는 바우하우스처럼 학생들이 기초적인 디자인 요소를 습득하게 하는 교육과정이 들어 있다.

바우하우스는 1933년 독일 정부에 의해 문을 닫게 되었지만, 대표 작가들은 미국 및 서방국가들에서 계속해서 연구하고 전파하였고, 이후 시카고에서 뉴바우하우스(New Bauhaus)운동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바우하우스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건축 및 디자인 분야에서 독특한 특성을 가진 사조로 평가되고 있다.

1385호 20면, 2024년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