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잉 칙, 위잉 칙’. 투명 유리로 둘러싸인 네모반듯한 통 안에서 기계 한 대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기계는 한 쪽에 놓인 종이컵 여러 개를 하나씩 순차적으로 다른 쪽으로 옮기고 있었다. 독일 보쉬 렉스로스(Bosch Rexroth)의 스마트 펑션 키트(Smart Functino Kit)다. 공장에서 부품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데 쓰이는 도구라는 게 부스 직원의 설명이다.
옆 홀을 가자 3D 프린팅을 활용한 신발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번엔 바스프(BASF)의 3D 프린팅 모델이다. 부스 안내 직원은 운동화 바닥에 부착하여 걸을 때 충격을 완화하는 열가소성 폴리우레탄을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하노버 산업박람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독일 하노버 산업박람회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기계 및 산업 전시회 중 하나로 올해 76회째를 맞았다. 전시회 주최사인 도이체 메세 (Deutsche Messe AG)는 2차 대전 패전 후 독일 경제 부흥을 위해 조직됐다. 이후 1947년 8월 첫 전시회가 열렸고, 이후 전 세계에서 산업 트렌드와 신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대표 산업 전시회로 성장했다.
하노버 산업전은 4차 산업혁명의 ‘성지’로 불리기도 한다. 2011년 당시 독일 메르켈 총리가 하노버 산업전에서 이른바 ‘인더스트리 4.0’을 발표했다. 서비스 산업을 기본으로 정보통신기술(ICT)과 제조업을 융합하는 4차 산업혁명을 통해 독일 제조업의 발전을 도모하려고 한 것이다.
올해도 약 70여 개국에서 4,000여 개 이상의 기업이 참여해 약 1만 4,000여 개의 제품을 선보였다. 대표 업체로는 독일 지멘스, 보쉬를 비롯해 IT업체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이 참여했다. 전시회 자체에만 13만여 명의 참관객이 다녀갔다고 주최 측은 발표했다. 핸드폰, IoT 기기 등 쉽게 볼 수 있는 B2C 제품이 아닌, 인공지능, 기계, 중장비 등 대부분의 제품이 B2B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실제 전시장을 가면 공장에 왔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다양한 기계, 로봇, 공장 설비, 소프트웨어 등이 전시되어 있다. 생산 기기와 생산품은 통신망을 활용해 상호 소통 체계를 구축하여 전체 생산 과정을 최적화하고 있어 참관객은 마치 4차 산업의 중심에 와 있다는 기분이 든다. 대부분 사물인터넷, 모바일,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등의 방식으로 구현된다.
이번 전시회 트렌드로 △인공지능 △수소 △에너지 관리 △탄소중립 △인더스트리 4.0 △제조업-X (Manufacturing-X) 등이 꼽혔다.
인공지능의 경우 데이터 분석, 디지털화 및 자동화, 에너지 관리에 적용된다. 대표적으로 독일 기업 지멘스와 미국 소프트웨어 업체 마이크로소프트 간의 협업 사례를 꼽을 수 있다.
지멘스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팀 센터(Team Center)라고 불리는 인공지능 챗 시스템을 활용하여 한 번의 소통으로 제품 결함을 발견하고 해결한다. 예를 들어, 지멘스 쿠알라룸푸르 공장에서 기계 결함이 발견될 경우,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챗 시스템에 올리면 뮌헨 본사에서 이를 확인한다. 이어 인공지능이 기계 결함을 분석하여 해결 방안을 제시하는 식이다.
이를 통해 제품의 결함을 즉시 해결할 뿐만 아니라 사전에 발견하여 더 나은 생산 프로세스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마이크로소프트 부스에서 오픈 AI 인공지능 시스템인 챗 지피티(Chat GPT)가 직접 로직 컨트롤러의 코드를 프로그래밍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드릭 나이케 지멘스 최고경영자(CEO)는 “혁신적인 인공지능 시스템은 디지털 전환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술이다”라며 “지멘스와 마이크로소프트는 챗 지피티 같은 도구들을 개발하여 기업이 혁신적인 방식으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또 기후 보호를 위한 기술에 대한 관심도 뜨거웠다. 전자 부품 제조업체인 뵈너(Wöhner)는 이번 전시회에서 스마트 에너지 분배 시스템인 크로스보드(CrossBoard)를 공개했다. 샘플 바 형태의 시스템은 에너지 분배 과정에서 여러 데이터를 수집하여, 전력과 에너지 소비가 적정한지 확인한다. 이를 통해 에너지가 초과 사용될 경우 시스템을 자동 차단할 수 있다.
독일 기계공업 협회 틸로 브로트만 대표는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 가능한 발전은 세계적으로 산업계의 최우선 과제다”라며 “탄소 중립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원 절약과 효율적인 생산을 위한 새로운 지능형 기술과 솔루션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제조업-X(Manufacturing-X)에도 많은 관심도 쏠렸다. 제조업 X는 독일 정부에서 2022년부터 추진하는 이니셔티브로, 기업 간 정확하고 신뢰도 높은 개방형 표준을 기반으로 하는 데이터 공유를 주요 골자로 한다. 새로운 데이터 생태계를 구축하여, 인더스트리 4.0을 현실에서 효율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한 목적이다. 예를 들어, 조선, 자동차, 전자, 생필품 등 각기 다른 산업에서 활용되는 데이터들을 하나의 공간(Datenraum)에 공유하여 산업의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다.
하노버 전시 당국 요한 쾨클러 이사는 “이번 전시장에서 여러 산업의 새로운 트렌드를 실물로 볼 수 있었다”라며 “친환경을 위한 고급 제품, 혁신적인 수소 기술, 음성 인식으로 AI를 이용하는 로봇, 효율적인 에너지 관리 솔루션 등을 포함해 중소기업들도 디지털 비즈니스 모델을 찾을 수 있는 새로운 데이터 생태계 정책인 제조업-X를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노버 산업전의 또 다른 특징은 수많은 컨퍼런스가 전시장 곳곳에서 개최된다는 것이다. 올해에도 무려 1,870명의 연사가 10개의 각기 다른 컨퍼런스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일반인의 경우, 전시회 입장 티켓만 있으면 모든 컨퍼런스에는 무료로 참석할 수 있다. 각 홀마다 전시 트렌드가 다른 만큼 전체적으로 여러 산업의 비즈니스 모델에서부터 산업정책 및 기술 법령 등 세계 산업의 흐름을 한 눈에 볼 수 있었다.
영국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 기자였던 에몬 핑클톤은 저서 ‘제조업이 나라를 살린다’에서 “IT 및 금융 등 서비스 산업에 편중된 경제 구조는 수출 경쟁력 악화와 고용 밸런스 붕괴 등을 야기한다”며 “미래 경제의 가장 유망한 산업은 제조업”이라고 강조했다.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2019년 코로나 등의 위기에도 제조업 비중이 높은 독일은 다른 국가들보다 빠르게 경제 회복을 이룰 수 있었다. 그 기저에는 숙련된 노동력을 요하는 자동차, 기계 등 전통 제조업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수출 경쟁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이처럼 제조업은 경제 구조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역시 우크라이나 사태에 따른 수출 악화, 지정학적 리스크 등 여러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경제의 근본인 제조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코트라 함부르크 무역관 윤태현 과장
1313호 17면, 2023년 5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