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스코 다 가마
그리스 아테네시대부터 이태리 르네상스시대까지, 후추와 같은 수많은 조미료들이 아시아지역에서 재배된 후 아라비아나 이집트 또는 지중해를 거쳐 베니스 등 유럽으로 수입되어 오기는 했으나, 워낙 값이 비싸 왕족이나 부유층들만 즐길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오늘날에 널리 보급된 후추나 조미료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저절로 나올 일이지만 독특한 매운 맛을 내는 후추는 당사로서는 음식마다 뿌려지는 최상의 조미료였기 때문이다.
이런 조미료와 금은보화를 가져오기 위해 15세기경부터는 유럽의 많은 해양국과 수많은 항해사들이 인도로 가는 길을 찾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유럽의 해양국가들 중에서도 특히나 포르투갈 항해사들이 인도로 가는 항로 찾기에 더욱 열성을 보였는데 당시의 하인리히 황태자(Prinz Heinrich)는 나중에 <항해사> 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인도로 가는 항로 찾기를 독려하고 자금을 지원해 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뒷받침 해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비싸게 팔리는 조미료들을 직접들여와 일반인들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한 국태민안(國泰民安) 정책의 일환 때문이었다.
인도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모험을 거는 이유는 동양에서 얻어지는 조미료 대부분이 아랍중개상들이 독점하여 매점매석 하고 있는 것을 피해 직거래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아랍인들은 동양의 조미료들을 대부분이 낙타를 이용해서 운반해 왔기 때문에 항로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던 미개척의 시대였다.
1487/1488년에 들어서야 바톨로메 디아스(Bartholomeu Diaz)라는 포르투갈 항해사가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아프리카의 최남단인 희망봉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기록을 세웠다.
디아스가 처음 발견한 이 아프리카 최남단을 <폭풍의 항구>로 이름을 지었지만 포르투갈왕실에서 희망봉(Cabo da Boa Esperanca)라고 바꿔 부르라고 해서 희망봉이 된 것인데 이 항구를 지나면 인도로 갈 수 있다는 희망과 용기를 주기 위해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크리스토프 콜럼버스(Christoph Columbus)도 스페인의 왕명에 따라 인도를 서쪽으로 항해해서 찿아 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헤매고 있었다.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항해해서 인도에 가려고 한 것은 희망봉을 선점한 포르투갈이 유럽에서 인도로 가려면 이곳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다는 잇점을 이용해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에게 많은 세금을 부여했기 때문에 다른 항로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콜럼버스는 인도를 가기위한 방향부터 잘못 잡고 있었던 것이다.
콜럼버스가 그렇게 헤매고 다닌 덕분에 중남미 지역의 여러 섬을 발견할 수 있기도 했다만 죽을 때까지 그곳이 자기가 찾아 헤매던 인도인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아프리카를 돌아가야 인도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안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는 10년후인 1497년 4척의 범선에 모두 170여명을 태우고 계속해서 남쪽으로만 항해하던 12월 드디어 반환점이 되는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통과할 수 있었다.
희망봉을 돌아서부터는 다시 북상하면서 지금의 케냐령인 말린디(Malindi) 를 지나는 등 일로일로 인도양에서 인도를 향해 정확하게 항로를 잡아 갈 수 있었다.
드디어 1498년 5월,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의 남쪽 항구도시인 칼리컷(Calicut) 에 도착할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 3개월 정도 체류하면서 인도와 포르투갈의 교역을 맺고 떠나려 했지만 유럽으로부터 가져와 팔 것이 없다고 판단한 상인들과의 협상에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바스코 다 가마는 1499년 8월초에 인도 칼리컷을 떠나 9월 9일 폴투갈 리스본으로 다시 귀환했을 때에는 영웅적 환영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도로부터 많은 조미료를 가지고 올 수는 없었어도 인도로 가는 항로를 처음 개척한 그는 국가로부터 귀족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고 왕으로부터는 <인도양 제독>이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집트의 수에즈운하가 개발되기 전까지는 유럽에서 인도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아프리카의 희방봉을 돌지 않고는 갈 수 없었지만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부터는 희망봉을 거치지 않고 갈 수 있게 되었다.
사진: 바스코 다 가마 항로
2019년 12월 6일, 1149호 1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