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만섭
언덕 위에 높게 지어진 본관건물의 호텔방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환상적이다. 이보다 더 좋은 경치가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싶다. 귀뚜라미는 시끄럽고 바람은 감미롭다. 귀뚜라미들도 가끔씩 휴식시간이 있는지 절간처럼 조용할 때가 있는데 아마 귀뚜라미들도 노동시간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테네 지방의 지중해변의 기온은 여름에는 비가 적고, 겨울철만 어느 정도의 비가 내린다고 한다. 그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무들의 몸부림은 필사적이었는지 그런 괴로움을 몸에 담은 꾸불꾸불한 나무들의 몸통이 그걸 말해 주고 있다.
7월 29일(월)은 다른 날과 달리 파도는 바람과 함께 높게 일었고 바닷가야외식당에서 식사하던 손님들은 바닷물이 튀는 파도에 물벼락을 맞으며 놀라 소리를 질렀고, 그 놀라움은 바로 즐거운 환호와 함께 웃음소리가 넘친다.
바닷가에서의 열흘 동안의 휴가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8/1(목)은 아테네로 이동하는 날이다. 아테네에서 머물 호텔은 시내중심가에 있는 국회의사당 바로 앞 길 건너편에 있었다. 이곳에서 3박을 하고 나면 이번 휴가가 끝나 독일로 돌아가는 날이다. 다음날 올림픽경기장(제1회 올림픽 1896년)과, 오페라하우스를 둘러보기 위해서다.
37도의 고온에서 걷는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모험이다. 내가 다시 살아서 호텔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친다. 국회의사당 앞에서는 마침 보초병들의 교대식이 있었고,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호기심 속에 구경에 열중이다. 우리일행은 커다란 국립공원의 그늘만 이용해서 걸었지만, 더위가 보통이 아니다. 간간이 지나치는 그늘이 없는 곳을 걸을 때의 햇볕은 숨이 막혔고 무섭기까지 했다. 어렵사리 구경을 마친 우린 다시 국립공원의 그늘을 지나 플라카(plaka) 먹자골목을 향해 걸었다.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좁고 음침한 옛길을 걷는다는 것은 헉헉거렸지만 흥미롭고 신비로움을 동반한 즐거운 고통이었다.
플라카 먹자골목은 아크로폴리스 아래쪽에 있었고, 더운 날씨에 골목길은 좁고, 주차되어 있는 차와 지나가는 자동차, 오고 가는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식당을 찾아 가는 건지? 죽을지도 모르니까 미리 먹고 보자는 것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음식은 싸고 맛이 좋았으며 분위기 또한 좋고 또 좋았다.
토요일에는 미리 예약해 놓은 가이드가 호텔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와 국립고고학박물관을 보기 위해서다. 아크로폴리스(아크로=높은, 폴리스=도시국가) 언덕에는 니케 신전, 파르테논신전, 여자 여러 명이 건물을 머리에 이고 기둥역할을 하고 있는 에렉티온 신전 등 신전들의 기둥만 덜렁 서 있었다. 영웅들은 이미 오래 전에 다 떠나고 없었고, 기둥들만 서서 옛날의 영광을 말해준다.
B. C. 5세기경 페리클레스 시대에 만들어진 이 신전들이 있는 아크로폴리스는 옛날에 화산이 터졌던 곳으로 용암이 녹아 대리석처럼 미끄러운 바닥들이 많았다. 호텔 8층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 멀리서 보았던 아크로폴리스는 시내복판에 있는 작은 언덕으로 보였는데 실제로 올라와 보니 높고 크다. 나는 나무그늘에서 앉아 디오니소 극장을 내려다 보면서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고, 다른 일행들은 가이드의 설명을 듣느라 정신이 없다.
설명을 듣던 일행들(3명)은 지금 하고 있는 가이드의 실력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극찬을 했고, 가이드는 이렇게 많은 역사를 알고 있는 손님들은 가이드생활 50년에 처음이라고 칭찬을 주고받는다. 칭찬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기들끼리 ‘장군 멍군’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은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펑퍼짐한 모양을 하고 있는 혼돈(카오스, chaos)이었다고 그리스인들은 믿었다. 이 혼돈의 반대말은 질서(코스모스, cosmos)다. 여기에 ‘자연’이라는 신이 출현해 카오스를 정리한 다음 어둠의 신 에레보스와 밤의 여신 뉙스로 나누었다. 뉙스는 라틴어로 녹스(nox)가 되었고, 야상곡을 뜻하는 영어의 녹턴(nocturn)이 여기에서 유래된다. 인류의 역사가 이처럼 그리스신화의 바탕 위에 좌우상하로 연결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원래 에레보스와 뉙스는 남매간이었으나 그때는 남매라는 구분이 없었다. 둘은 결혼을 했고, 낮의 신 헤매라와 대기의 여신 아이테르를 낳았다. 우리가 이터르 혹은 에테르(ether)라고 하는 말은 ‘푸른 하늘’ 아이테르(대기의 여신)는 여기에서 유래된다. 이런 것들만 보아도 지금도 우리는 그리스신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자연’이라는 신은 하늘에서 땅을 떼어 놓았고, 땅에서 다시 물을 떼어놓았다. 대지에서는 다시 맑은 하늘을 떼어 놓았고, 그 이외에 가능한 모든 것들을 분리시켜 이 세상을 평화와 조화를 이루게 만들었다.
자연의 신이 이렇게 자연을 정리하자, 무게가 전혀 없는 불과 사물을 태우는 기운은 높은 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공기는 그 아래에 두었으며, 불과 물보다 밀도가 높은 땅은 단단한 물질을 끌어당겼다. 자연스럽게 무게가 늘어나면서 땅은 아래로 내려오게 된다. 그리스의 신화는 그럴싸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다. 땅의 신 가이아(Gaea),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는 살아가면서 할 일들이 너무 많이 생겨나자, 계속해서 필요한 새로운 신들을 만들어 세상의 공백을 채워나갔다. 그들은 12명의 자녀를 낳은 뒤에도 쉬지 않고 많은 자식들을 만들어 갔다.
밤의 여신 뉙스는 날개를 퍼덕거리면서 거대한 알을 낳았는데, 그리움의 신 에로스(Eros)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신 에로스가 아니라, 이 세상에 필요한 온갖 것을 낳아야 하는 ‘생산의 신 에로스’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낳은 12남매는 곧 티탄 (Titan)족, 즉 거신족이라 불렀으며, 천하장사를 뜻하는 티타닉(거대한 배, Titanic, 타이타닉)이 빙하에 부딪쳤던 유람선사고를 다룬 영화도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자식들마다 신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섯째 아들 이아페토스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큰아들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먼저 아는 자)와 작은 아들 에피메테우스(Epimetheus, 나중 아는 자)를 낳았다. 이 두 단어의 접두사 ‘프로(pro)’와 ‘에피(epi)’는 머리말을 뜻하는 프롤로그(prologue)와 끝말을 뜻하는 에필로그(epilogue)로 지금도 책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뉘는 용어로 사용되면서 우리들의 이해를 돕는다.
*참조 : 그리스 로마 신화(이윤기), 그리스(손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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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3월 27일, 1164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