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의 생가 잘츠부르크(Salzburg)

황수잔

오래전 우리부부는 겨울여행으로 뮌헨에서 차로 2시간정도 걸리는 바이에른 조그만 마을 Bad Reichenhall에 사는 시댁 친척을 방문했다.

눈으로 덮여있는 간선도로에서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아름다운 풍광에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높고 낮은 산들이 온통 하얗다. 숲과 얼어붙은 길에 하얗게 쌓여있는 만발한 눈꽃들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아담한 단독주택에서 사는 친척집에 도착한 집 앞에는 추운겨울을 보내기 위해 장작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처음으로 상면한 친척들에게 우리들은 서로 반갑게 포옹과 키스로 인사를 나누었다. 벽난롯가에 앉아 장작이 타닥타닥 거리며 빨갛게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면서 아로마 향이 있는 뜨거운 차를 마시고 함께 보냈던 시간은 무척 낭만적이었다.

이튿날 바이에른 상징인 구운 하얀 소시지와 단겨자(Suesser Senf)를 맛보고 한잔의 따끈한 커피와 빵과 함께 특별한 아침식사를 한 후, 산과 나무들이 울창한 Koenig호숫가에서 여객선을 타고 자연을 즐겼다. 온 사방에 고드름으로 된 환상의 하얀 눈꽃송이들이 동화속의 그림 같았다.

잘츠부르크는 친척집에서 차로 20분정도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세계 곳곳에서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이곳 인구의 배 이상이나 된다는 잘츠부르크는 발을 들여 을 틈도 없이 인파로 북적거렸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들, 매혹적인 고급상점들과 레스토랑, 가게마다 모차르트 초상화로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고품격인 동그란 초콜릿 모차르트쿠겔(Mozartkugel)들이 화려한 포장과 함께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이곳은 온통 모차르트로 모차르트가 마치 살아 숨쉬는 예술의 도시였다. 지금은 소시지, 요구르트, 우유통에도 모차르트 초상화로 포장되어있다.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 관광으로 시민들을 먹여 살린다고 하니 이곳에서 탄생한 음악가 모차르트 예술의 위대성을 실감나게 한다.

잘츠부르크(Salzburg)는 ‘소금의성’ 이라는 뜻이다. 기원전1000-450년 옛 독일인들이 정착해서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Duerrnberg, ‘소금의산’을 발견하게 되어 소금을 제조하면서 무역을 했다. 그들은 이곳을 Juvam이라 불렀다.

로마황제 Claudius(서기 41-54)가 이곳에 로마인들이 모여 사는 성을 지었다. 470년 가톨릭 공동수도원을 지었다. 700년 Peters교회를 건축했으며 수도원을 Nonnberg에 지었다. 8세기 바이에른의 칼(karl)은 영주이며 대주교로 세속과 교회, 모든 권리를 잡고 있는 막강한 권력자였다. 그는 처음으로 돔(Virgil)을 건축했으며 북쪽 바이에른의 프랑켄까지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1077년 오래되어 페허가 된 로마성 자리에 견고한 요새건축물들을 지었다. 1167년 Friedrich Barbarossa시대가 되면서 도시는 불타고 무법천지로 혼란을 가져왔다.

이후 도시는 다시 풍요로워졌고 13-17세기에 걸쳐 왕정시대가 되면서 우아하고 화려한 궁전들을 건축했다. 17-18세기에 걸쳐 100개 이상이나 되는 교회, 성, 궁전들을 화려한 바로크양식으로 건축했다.

1756년 천재음악가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탄생했다. 1816년 나폴레옹 전쟁에 패전하고 빈회의(Wiener Kongress)에서 독일이었던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로 결정하였다. 독일인이었던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인으로 되었지만 독일인들은 유명하게 된 모차르트를 독일인이라고 고집한다고 하니 유명인이 탄생하기만 해도 대단히 영광스러운 자리라고 볼 수 있다. 1818년 도시는 불타서 파괴되었다. 니콜라우스교회에서 처음으로 성탄성가 ‘고요한밤’을 불렀다. 1842년 모차르트 동상이 세워졌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도시는 다시 전성기가 되었고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아름답게 건축했다.

1917년 8월1일 잘츠부르크에서 페스티벌 공동체가 탄생하였다. 1920년 8월 22일 페스티벌축제를 처음으로 돔(Domplatz)에서 세계적인 지휘자, 독일인 카라얀(von Karajan)이 오프닝에 연주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1956년-1960년 페스티벌 홀을 웅장하고 고풍적으로 화려하게 건축했다. 1967년 카라얀이 부활축제 연주를 하였다.

한편 1964년 잘츠부르크 로케이션으로 촬영한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잘츠부르크가 알려졌다. 또한 1984년 오스카상 8개 부문을 수상한 명작 ‘아마데우스’ 영화가 상영되면서 ‘모차르트’ 붐이 일어났고 잘츠부르크는 세계적인 관광명소가 되었다. 1997년 잘츠부르크 구시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들어있다.

모차르트 (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생애와 음악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 Getreidegasse 9번지에서 태어났다.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는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는 신동인 것을 알았다. 3세에 모차르트는 피아노를 쳤다. 5세에 즉흥적으로 작곡해서 치기도 했다. 그는 완전한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한번 들으면 모든 음률을 즉시 외워버리는 신이내린 천재였다.

6세가 되자 아버지는 음악가 5살 위인 모차르트 누나(Maria Anna)와 함께 가족들은 전 유럽을 여행하면서 연주했다. 1763년 독일시인 괴테는 궁정에서 7세의 조그만 소년이 연주가발을 쓰고 웃음을 자아내는 어릿광대로 연주하는 모차르트, 청중들에게 대단히 오래도록 인기가 있었던 마이클잭슨처럼 당시 ‘팝스타’인 그를 보았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악보 없이 건반을 치는가 하면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기도 했다. 1765년 영국 공연에서는 영국 왕이 참석하였다.

어린 모차르트는 연일 계속되는 여행으로 자주 앓았고 생명이 위험할 때도 있었다. 1765년 발진티푸스로 2년 후에는 천연두로 앓았다. 그는 끊임없는 여행과 연주로 어린이들과 놀거나 친구를 사귈 기회가 전혀 없이 어른이 되었다. 정상적인 어린 시절을 보내지 못했기 때문에 후에 정서불안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없었다. 1769년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음악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를 포기했고 이탈리아로 가서 Bologna(이탈리아도시) 필하모니 교향악단학교 입학자격시험에 합격했고 단원이 되었다.

1770년 모차르트는 아버지와 함께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Florenz, Rom, Neapel, Pompeji, Rimini를 여행했고 Mailand로 돌아왔다. 여행을 하면서 연주하는데 6시간이나 걸리는 오페라 시리즈 ‘Mitridate’를 작곡했다. 1771년 그는 필하모니 교향 악단(Verona)악장이 되었다.

모차르트와 아버지는 작은 도시들을 여행하고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여행을 하면서 성미사곡을 작곡했고 이탈리아 여행에서 세레나데를 작곡해서 Ferdinand 대공(옛 오스트리아 황태자칭호)결혼식에서 축하 연주를 했다.

그는 많은 여행을 통해서 얻은 영감으로 불후의 걸작들을 작곡했다. 1772년 3번째 여행을 떠나면서 밀라노에서 오페라 작곡을 끝마쳤다. 4년 후 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왔고 1777년 어머니와 둘이서 파리 연주여행을 떠났다. 파리여행에서 어머니 죽음을 보는 슬픔을 겪었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미국에서 타계한 후 취재하러온 기자에게 반려자이자 예술동지였던 일본인 구보타 시게코는 “고인의 마즈막 순간에 아침과 정심 저녁 모두 맛있게 먹고 갑자기 숨이 거칠어져서 숨이 멈춰 있었다.”고 한다. 죽음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인간들은 잠간 머물다 가는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나게 한다.

모차르트는 파리에서 오페라가수가 되기를 원하는 17세의 Aloysia Weber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어 결혼하려고 했으나 그녀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반대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들의 성공에만 관심이 있었던 완고한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일찍 발견하고 재능을 살려 아들을 유명하게 했지만 그들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았다. 서로 대화가 없는 부자관계로 모차르트는 항상 외로웠다고 한다.

22세 모차르트는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대주교 궁정음악가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질식할 것 같은 권위를 중요시하는 고향에서 대주교 궁정음악가로 사는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개방적이고 자유스러운 비인으로 가서 사랑하는 Aloysia 어머니 집에서 살았다. 그녀는 이미 결혼했고 동생인 Contanze와 결혼했다. 이번에도 모차르트아버지는 여전히 그들의 결혼을 반대했다.

천재음악가로 유명한 당시 팝스타 모차르트는 작곡가로, 연주자로, 음악교사로 상당한 고액의 보수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모차르트와 아내는 계획 없는 낭비로 가난과 빚에 쪼들리면서 페인처럼 살았다. 심각한 모차르트의 문제는 정서불안으로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였다. 1년에 9번이나 이사를 가기도했다.

1787년 요셉 2세 황제는 모차르트 음악을 대단히 좋아해서 그를 궁정음악가로 임명했다. 당시 유명한 이탈리아 음악가인 살리에리가 궁정악장으로 있었다. 살리에리는 자신보다 탁월한 젊은 천재음악가를 아버지처럼 친절하게 예의를 갖추어 대했으나 시기와 질투로 선망의 대상인 그를 미워하고 비방하면서 온갖 훼방을 놓았다. 모차르트도 자기보다 실력이 없는 살리에리가 악장으로 있는 것에 화가 났고 직설적인 그는 궁정음악가 자리를 포기했다.

당시 빈에서 경쟁자였던 둘의 관계를 테마로 많은 작가들의 상상인물이 되었다. 1979년 초연된 영국 극작가 피터 세퍼의 연극 ‘아마데우스’는 이같은 소재가 진화한 하나의 절정이었다. 밀로시포르만 감독이 1984년 선보인 명작 오스카상 8개 부문을 수상한 ‘아마데우스(Amadeus)’ 영화는 이탈리아인 살리에리가 오스트리아인 모차르트와 벌인 갈등을 테마로 하였다.

영화에서 모차르트(Tom Hulce분)는 웃음을 자아내는 어릿광대로, 화려한 궁정 음악가로 활동한다. 경쟁자인 살리에리가 시기와 질투로 모차르트를 비방하다가 모차르트의 죽음으로 그는 심한 괴로움과 죄책감으로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노후를 정신치료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살리에리교수가 신부에게 고해성사하는 그들의 이야기로 줄거리가 이어진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후 신부에게 “모차르트는 나로 인해 죽었고 나는 하늘의 벌을 받아 평생 죄책감으로 이렇게 오래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끝 장면이 무척 감동적이었다. 살리에리가 죄의 대가로 인간의 고뇌, 저변의 모습을 잘 보여주었다.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의 장례식은 영원히 잠든 시신을 싣고 가는 부인과 마부뿐인 너무나 초라했다. 비가 쏟아지고 사방이 컴컴해지더니 그가 작곡한 미완성곡인 ‘메시아’ 중 ‘레퀴엠(Requiem)’ 곡이 들리면서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더욱 슬프게 했다. 그렇게도 유명했던 그는 어딘지도 모르는 빈민묘에 함께 매장되었다. 부와 가난의 극치를 살다가는 그의 생애를 보여주었다.

영화를 보고난 후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관계에서 살리에리는 유다가 예수를 팔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를 본 유다의 심정과 같았으리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왠일일까? 안토니오 살리에리(F. Murray Abraham분)는 이 영화에서 오스카 연기상을 수상했다.

모차르트는 프리랜서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교향곡, 오페라, 종교음악, 파티를 위한 경음악까지 많은 걸작들을 남겼다. 그가 죽기 전 최악의 빈곤과 빚으로 삶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생애 최고인 걸작 돈조바니(Don Giovanni), 마술피리(Die Zauberfloete)를 작곡했다.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집은 탄츠마이스터집(Tanzmeisterhaus)이였다. 1617년 문서상으로 유지하다가 1711년부터 왕족(귀족)학교로 사교춤과 에티켓을 가르치면서 귀족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주인 Speckner부부는 모차르트 부모와 가까운 친구였고 그들이 결혼할 때 입회인이 되기도 했다.

모차르트가 태어나서 음악활동을 하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아들의 작업을 위해서 1773년 Makart Platz 8인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2차 세계대전 폭격으로 이사 간 생가는 거의 파괴되었다. 1955년 양쪽 생가를 시에서 매입하고 복원해서 생전의 모차르트의 625곡의 걸작들과 자료들을 모아 전시하는 국제적 모차르트 재단법인 모차르트 관광명소로 만들었다.

1994년 5월 4일 모차르트 집들을 아름답게 재건축했다. 2006년 1월 27일, 세계적인 천재음악가 모차르트가 탄생 250주년을 맞아 고향인 잘츠부르크와 활동무대였던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각종 공연과 행사가 이루어졌다. 불후의 걸작 625곡에 이르는 그가 남긴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오페라, 무용, 현대음악이 공연되었다.

250년 전 모차르트의 35년의 짧은 생애는 끝났지만, 그가 남긴 예술품들은 영원히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1228호 20면, 2021년 7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