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간호사 일기

파독 간호사 55주년에 강정희

신세계 꿈을 향한 머나먼 낯선 자리

나날이 가슴으로 마음을 낮추었다

손과 발 나이팅게일 훈장이듯 박힌 살

 

지겨운 가난살이 목돈에 귀가 솔깃

짧고도 긴긴 세월 3년의 고용계약

밤이면 꼭꼭 품고 잔 눈물 밴 가족사진

 

고향이 그리우면 김치를 입에 물고

거울 앞에 색동옷 일깨웠던 정체성

아득한 하늘을 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전화벨 울릴 때면 가슴이 조마조마

지레 겁 목소리에 눈시울 붉어지던

알알한 습진 기억이 두고두고 서럽다

 

보이지 않는 냉기 행여나 흉잡히라

하회탈 천진난만 눈물 꽃 살랑대며

우리는 늘 상냥했다 하늘처럼 해처럼

 

짝짜꿍이 입방아 깔깔 깔 웃음소리

벙어리 귀머거리 소외된 속앓이는

언어의 변비를 점점 더 심하게 하였던

 

부르기 힘들다며 내 본명 제쳐 두고

하루아침 새롭게 둔갑한 우리 이름

검은색 머리의 수산나 모니카 사비나로

고국에서 못 피운 생기로운 비단 꿈

해 오름 열정으로 힘든 만큼 믿으며 우리는 훨씬 강했다. 생각한 것보다 더

 

빨간색 호출 신호 맨 먼저 달려가고

미리 톡 근육주사 감쪽같이 잘 놓는

동양의 순 연꽃으로 청순하게 불리며

 

우리 몸 두 배 되는 독일인의 몸무게

꼿꼿이 허리 펴며 야무진 손끝으로

고목의 새순 돌보듯 정성을 다하였다

 

온갖 시름 잊게 한 눈물 피땀 대가는

꼬박꼬박 아우 학비 부모님 가택 적금

몸뚱이 찌그러져도 눈물겹게 뿌듯했던

부어오른 설움을 말없이 다독이며

덧없이 주저앉아 굳세게 내린 뿌리

고생도 세월 앞에선 둥지 친 행복이다

 

둥글게 꽃을 피운 인연의 동병상련

보람찬 기쁨 속에 출렁이는 감사는

점점 홍* 한데 어울려 햇살처럼 퍼진다

 

고요한 영혼 속에 후덕한 깊은 심지

잔주름에 숨겨진 맑고 고운 미소는

가 버린 우리 봄날의 눈물과 땀방울이

길고 긴 세월 속에 묻혀버린 꽃 청춘

입술을 깨물면서 인내로 녹인 고뇌

질기게 살아온 인생 연륜이 흔들린다

노을 진 언덕 위에 우뚝 솟은 푯대는

설움을 승화시킨 결 바른 체험 산물

우리의 자존심이고 사랑의 산 역사다

세월의 강을 넘은 독일 속의 한국서

맛깔 난 한국 음식 즐겨보는 드라마

모국의 무관심에도 마냥 그리워하며

새벽 날개 치면서 올차게 가꾼 세월

아낌없이 쓰인 몸 휘어진 달그림자

가쁜 숨 가다듬으며 해넘이에 물든다

 

굽이굽이 오십 년 열정을 불태우며

이 땅에 심어 놓은 코리아의 혼백은

긍지의 백의 천사로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의 발걸음과 숨소리가 멈추면

우리 꿈 우리 뼈는 독일 땅에 묻히려니

영혼은 숨 죽은 그리운 고향 땅을 찾으리

 

*점점이 붉음, 여기저기 울긋불긋하게 꽃이 핀 모습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1237호 17면, 2021년 10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