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200주년 맞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5월 12일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의 탄생 200주년이다. 그러나 나이팅게일을 ‘백의의 천사’로만 기억해선 안 된다. 크림전쟁 기간 악명 높은 영국군 관료주의에 맞서 싸우며 군 의료체계를 완전히 뜯어고쳤고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전문 간호학교와 여성의과대를 세운 탁월한 조직가이자 행정가였다. 또 입원 중인 영국군의 사망률을 46%에서 2%로 떨어뜨리는 데 수학교과서에서 배운 통계를 적용한 현대적 통계학자이기도 했다.
현대 간호학 정립과 보건위생 확립한 나이팅게일
나이팅게일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나, 피렌체의 이름을 따 플로렌스라는 성을 지니게 되었다.
1837년부터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을 돕는데 바치기로 결의하고,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치다가 1844년에 간호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후 독일 카이저벨트의 프로테스탄트 학교에서 간호학을 공부하고 1853년 8월부터 10월까지 런던병원(The Care of Sick Gentlewomen) 작은 요양원에서 간호부장으로 일했다.
크림 전쟁과 나이팅게일
16세기 이래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오스만제국(지금의 터키)은 19세기 들어서며 그 세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오스만제국의 영토를 호시탐탐 노리던 러시아는 예루살렘의 그리스 정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선전포고를 하며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약 3년동안 벌인 전쟁이 크림전쟁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90만대군에 맞서 오스만제국은 물론 프랑스 제2제국과 대영제국의 동맹군 60만명이 3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러시아를 패배시킨다.
그러나 이 전쟁이 역사상 의미를 갖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무엇보다도 간호위생학의 발전에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동맹군의 부상자들은 크림반도에서 흑해를 건너 이스탄불로 옯겨졌지만, 의사도 간호사도 충분하지 않았기에 부상병의 대부분이 열악한 환경속에서 죽어나갔다. 이 때 ‘백의의 천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등장하여 38명의 간호대를 조직하여 이스탄불의 위스퀴다르 병원으로 갔다.
당시 군병원은 이름만 병원이지 부상병들이 응급치료만 받고 군복을 입은 채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고 방치되 있었다. 나이팅게일은 우선 환자들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기 위하여 깨끗한 환자복을 입히고 침대시트를 청결하게 관리하며 합리적인 병원체계를 갖춰 나갔다. 또한 부상, 질병, 사망 통계를 정리하여 병원의 위생상태를 개선하여 병원에서 통계학을 적용하였고,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야전병원에서 환자 사망률은 42%에서 2%로 감소했다고 한다.
크림전쟁 이후의 나이팅게일
1855년 11월 29일에 간호사를 전문직으로 바꾸기 위한 Nightingale Fund를 설립하였다. 이 모금으로 1860년에 런던의 세인트토마스병원에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자매결연을 맺은 병원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1859년에 간호전문서적 [간호론]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간호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도 인기를 끌면서 간호학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켰다. 플로렌스가 쓴 책은 간호학과 신학, 에세이 등을 포함하여 200여권에 달한다.
“만일 어떤 환자가 추워한다거나, 고열에 시달린다거나, 쇠약해 있다거나, 음식을 먹고 괴로워한다거나, 또는 욕창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대체로 질병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간호에 기인하는 것이다. (…) 간호는 투약하거나 습포제를 바르는 것 정도로 그 의미가 제한되어 왔다. 그러나 간호는 환기, 채광, 난방, 청결, 정숙 등의 적절한 활용과 식이의 적절한 선택과 관리 등, 환자의 체력소모를 최소화하면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의미해야만 한다.” -간호론에서
플로렌스 간호학교에서 훈련을 마친 간호사들이 1860년대부터 투입되어 런던의 병원과 영국 로열 빅토리아 병원 그리고 호주 시드니 병원에서 활동하면서 전문직 간호사에 대한 인식을 높였다. 미국 최초의 간호사, 린다 리차드(Linda Richards) 또한 플로렌스 간호학교에서 훈련을 받았다.
남북 전쟁과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는 외국 정부의 고문으로 활약하였다.
나이팅게일은 1883년에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Royal Red Cross 훈장을 받았고, 1904년에는 Order of Saint John로부터 Lady of Grace로 임명되었다. 1907년에는 영국 왕 에드워드 7세로부터 여성 최초로 메리트 훈장(Order of Merit)을 받았으며, 1908년에 런던의 명예시민(Freedom of the City)이 되었다.
플로렌스는 1910년 8월 13일에 90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 영향
1893년에 창설된 나이팅게일 선서(The Nightingale Pledge)는 현재까지도 간호학과에서 졸업을 앞둔 간호사들에게 제창된다. 2008년에 세계 보건 기구에서 시작된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선언 캠페인은 2016년까지 106개국이 참여하기로 서명하였다.
만국 적십자사에서는 1912년부터 나이팅게일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로 나이팅게일 메달(Florence Nightingale Medal)을 만들어 2년마다 간호사들에게 수여하였다. 1965년부터 플로렌스의 생일인 5월 12일은 국제 간호사의 날로 지정되었다.
이스탄불과 영국에는 플로렌스의 이름을 딴 병원이 설립되었고, 런던은 2010년 5월에 플로렌스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여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박물관이 설립되었다. 대영도서관 기록보관소에는 플로렌스의 목소리가 녹음된 축음기 음반이 있다.
나이팅게일은 단순한 ‘헌신적인 백의의 천사’였을뿐만 아니라 천재적인 통계학자이자 뛰어난 행정가였던 것이다. 문화사가 자크 바전은 나이팅게일에 대해 “나이팅게일은 간호 분야에서만 천재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감각도 남달랐다”고 평가했다.
나이팅게일 선서
–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전문 간호직에 최선을 다할 것을 하느님과 여러분 앞에 선서합니다.
–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습니다.
– 나는 간호의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겠으며,
간호하면서 알게 된 개인이나 가족의 사정은 비밀로 하겠습니다.
– 나는 성심으로 보건의료인과 협조하겠으며
–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습니다.
2020년 2월 28일, 1160호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