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기억해야 할 인물 (8)

순국 100주년 맞는 류관순

올해 9월 28일 순국 100주기를 맞는 류관순 열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기도 하다.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노력했지만 ‘독립’이라는 빛은 보지 못했다. 18년이란 짧은 생을 마감하고 25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후에야 결실이 맺어졌다.

류관순은 1919년 3·1만세운동의 단순 가담자가 아니었다. 3월 1일 만세운동 행렬에 이화학당 학우를 이끌고 동참했던 그는 고향으로 내려가 4월 1일 3000명 이상이 참여한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을 직접 조직했다. 이를 진압하던 일본군의 총검에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된 열일곱 살 소녀는 끝까지 자신이 주동자라 밝혀 징역 3년형을 언도받았다. 그가 복역 도중 숨진 것 역시 1920년 3월 1일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끝까지 항거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잔 다르크 류관순

류관순이 우리 민족에게 알려진 것은 그가 사망한 직후가 아니라 25년이 지난 해방 이후였다. 그 사이에는 거의 잊힌 인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유관순의 삶과 애국은 소설가 박계주에 의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셈이다.

1947년 2월 28일 경향신문 3.1운동 특집지면에서 박계주가 쓴 ‘순국의 처녀’가 소개되면서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류관순 기념사업회가 결성되고, 영화와 전기가 만들어지면서 류관순은 3.1운동의 상징이 됐다.

프랑스 올리비에 부지(Olivier Bouzy) 잔 다르크 연구소 학술연구원장은 “수많은 여성 전쟁영웅 중 잔 다르크가 역사적 상징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영웅이자 멋진 패배자와 같은 이중적 요소 때문이며 극적인 삶 속에서 어린나이에 사망한 것도 이유”라고 분석했다.

부지 교수는 잔 다르크의 극적인 애국적 투쟁의 삶은 류관순 열사의 그것과도 유사하다고 봤다. 차이가 있다면 잔 다르크는 생전에 영웅이 되었다면 류관순은 사망 이후 많은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라며, 류관순열사를 “한국의 잔 다르크”로 평가한 바 있다.

유관순 열사의 생애와 독립운동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류관순의 집안은 개신교 신자였던 할아버지 유윤기(柳閏基)와 숙부 유중무(柳重武)로 인해 일찍이 개신교 집안이 되었고, 류관순도 자연스럽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였다.

류관순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류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김복순·김희자·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류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류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류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류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류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47년 류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에는 류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1991년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1996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졸업장이 추서되었다.

사진: 류관순의 수형기록포

2020년 3월 6일, 1161호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