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조명되어야 하는 여성 과학자, 로잘린 프랭클린 탄생 100주년
“곧 나의 시대가 온다.”
다윈의 진화론으로 인해 세상이 떠들썩할 때, 유전법칙을 발견한 멘델이 한 말이다. 멘델은 이미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간파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자신감에 차 있을 정도였으니…. 그러나 진정한 천재는 생전에 그 천재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고 했던가. 그는 곧 차가운 주검이 되었다.
천재의 삶은 경탄스럽다. 그러나 때로는 이렇듯 가슴 아픈 천재성도 있다. 더구나 얼마나 많은 여성 천재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는가를 생각하면 안타깝기 짝이 없다. 과학계의 그런 대표적 인물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이다.
그녀는 DNA 이중나선 구조의 진실에 가장 먼저 다가간 과학자였지만 노벨상의 영광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했고 역사에서도 이름이 지워질 뻔했다. 그러나 사후지만 다행히 페미니스트 역사가들 덕분에 지금은 널리 알려지게 됐다.
빼앗긴 노벨상의 주인공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Elsie Franklin, 1920~1958)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은 20세기 인류가 이룩해낸 가장 큰 과학 성과로 손꼽힐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다.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이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하였으니 이 연구의 과학적 발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노벨상 영광의 주인공은 프랭클린이 나닌 3명의 남성 과학자였다. 제임 왓슨(James Watson),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모리스 월킨스(Maurice Wilkins)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DNA 연구에 있어 ‘왓슨’과 ‘크릭’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이들은 DNA 연구와 관련해 항상 따라 다닐 만큼, 이들의 공헌은 오늘날까지도 인정받고 있다.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에 큰 기여를 한 프랭클린이 어떻게 노벨상의 영광을 빼앗기게 된 것일까?
DNA 구조 발견의 그 이면에는 생명의 비밀을 독점하려는 학자들 사이의 경쟁심과 명예욕, 선두다툼, 우정과 반목이 뒤엉킨 인간드라마가 숨어 있다.
DNA 구조 발견의 역사적 무대는 1951년 영국 케임브리지대의 캐번디시 연구소이다. 당시 DNA의 비밀을 캐기 위한 경주에는 여러 연구자들이 각축을 하고 있었다.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 그리고 당대 최고의 과학자로 칭송받던 미국의 물리학자 라이너스 폴링, 영국 런던의 킹스 칼리지에서 일찍부터 X선 회절 사진을 통해 DNA를 연구하던 모리스 윌킨스와 로잘린드 프랭클린 등이 선두를 다퉜다.
그 중 왓슨과 크릭은 DNA 연구에서 가장 뒤떨어진다고 평가받던 인물이다. 쟁쟁한 과학자들의 경쟁에 왓슨과 크릭 같은 애송이가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왓슨은 시카고대학 졸업 3년 만인 1950년에 인디애나 대학에서 동물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지 1년밖에 안 된 젊은 청년이고, 크릭은 런던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출신으로 왓슨보다 12살이나 많았지만 학위도 없었고 경력도 신통치 않았다.
또한 왓슨과 크릭이 함께 일한 케임브리지대 캐번디시 연구소는 DNA 구조 연구의 후발주자였다. 2차 대전 후 물자가 부족했던 영국에선 두 개의 대학이 같은 연구를 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고, DNA 구조 연구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속한 킹스 칼리지 몫이었다. 그럼에도 왓슨과 크릭이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과학자들은 이미 유전정보의 비밀이 DNA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왓슨과 크릭은 생물학과 물리학을 바탕으로 각종 데이터를 분석하며 DNA의 비밀을 밝혀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DNA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를 밝혀내는 일이었다. DNA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실제 세포의 핵 속에 DNA가 어떤 모양으로 들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X선으로 사진(회절 무늬)을 찍어야 한다. 당시 여성 과학자 프랭클린이 찍은 DNA의 X선 회절사진은 이중 나선구조를 확신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됐다.
이 자료를 왓슨과 크릭에게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킹스 칼리지의 프랭클린 동료 윌킨스이다. 프랭클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윌킨스는 수시로 캐번디시 연구소를 방문해 프랭클린이 찍은 DNA X선 사진을 보여주고, 논문으로 출판되지 않은 데이터들을 제공했다. 더욱이 왓슨과 크릭은 프랭클린이 연구비 지원기관(의학연구위원회·MRC)에 비공개로 제출한 보고서를 은밀히 입수하기까지 했다.
윌킨스는 프랭클린의 사전 허락도 없이 회절사진을 분석했고, 프랭클린이 찍은 X선 회절사진에서 결정적 단서를 얻은 왓슨과 크릭은 곧 나선형 모형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DNA 이중나선 구조 모형이다. 1953년 왓슨이 과학저널 <네이처> 논문을 통해 DNA 이중나선을 밝힌 나이는 불과 25세다.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 세 사람은 1962년 12월, 스웨덴 스톡홀름의 노벨상 수상대에 나란히 섰다.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힌 것이 수상 이유다. 이때 프랭클린이 함께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은 암 선고를 받고 1958년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탓도 있다.
이 불운의 여과학자는 최근에 조명 받기 시작하면서 그녀에 대한 책들도 다수 발간되었다.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원제 The Dark Lady of DNA)’도 그 중 한 번역서이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그녀의 이름은 20세기 과학사의 가장 위대한 발견에서 부당하게 지워져 버렸다. 그녀가 잃어버린 것은 사실 노벨상이 아니라 그녀의 생명이었다.”
프랭클린의 업적이 제자리를 찾는 데까지 반세기가 넘게 걸렸고, 프랭클린의 업적은 다시 한 번 재평가되고 있다. 영국 BBC 방송은 그녀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를 제작했고, 영국 전통유산회 등 많은 단체에서 그녀를 기념하고 있을 정도이다.
프랭클린은 ‘여성 과학자 차별의 희생자’라는 여성 차별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기도 한다. 프랭클린은 여자에게는 학위를 주지 않았던 시절 대학을 다녔고, 여교수에게 식당 출입을 제한하는 시절 대학에서 연구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그녀는 당당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완벽주의자였다. 영국 정부는 이 비운의 여성과학자를 기리기 위해 ‘로잘린드 프랭클린 상’을 제정해 해마다 우수하고 업적이 탁월한 여성 과학자들에게 상을 수여하고 있다. 진실의 역사가 살아난 것이다.
2020년 3월 27일, 1164호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