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과정에서 동서독 정당체제의 변모 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1990년 10월 3일 통일될 때까지의 독일통일 과정에서 동서독의 정당통합은 실질적으로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인민회의 자유선거에서 시작해 1990년 12월 통일 이후 첫 연방선거 기간에 이루어졌다.
동서독 정당의 통합 1
서독과 동독의 기민당(CDU)
1989년 11월 10일 로타 드 메지에르 신임 당수의 선출, 12월 15-16일 동 베를린에서의 특별 전당대회를 통한 당 정강의 개정 등은 동독 기민당이 그 동안의 SED의 위성정당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1989년 11월의 비공개 전당대회, 12월의 특별전당대회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는 않지만 시장경제에서의 사회주의적 평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계속 이어진다는 의견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동시에 과거 위성정당의 노선과 더욱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입장도 제기되었는데 이들은 서독 기민당에 더욱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서독 기민당의 정책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새롭게 선출된 드 메지에르의 모습에서 잘 나타났다.
드 메지에르는 법치국가와 시장경제 체제에서 진행되어야만 하는 평화적인 과정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따라서 동독의 기민당은 앞으로 더 이상 사회주의통 일당-민사당과 연정을 맺는 일은 없을 것임을 명확히 하였다.
1990년 5월 중순 콜 수상과 드 메지에르는 동독 기민당과 서독 기민당의 통합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5월 21일 정당 수뇌부회의에서 드 메지에르는 동독 기민당이 서독 기민당으로 편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그는 동독 기민당과의 연대에 강조점을 두었고 낯선 대표들을 위한 선거연합이 되는 것을 중지시키겠다고 하였다.
드 메지에르는 서독 기민당 내에 있는 동독 기민당 비판가들에게 우리 동독 기민당은 연방공화국에서 기민당의 당원이 되는 것보다 동독에서 기민당의 당원으로 되는 것이 훨씬 더 쉽다고 말하면서 서독 기민당이 원하는 절차에 의한 동독 각 주별로 기민당에 가입하는 것은 문제가 있으며 동동한 파트너로서 결합을 더 선호한다고 분명히 말하였다.
또한 1990년 6월 18일 본(Bonn)에서 기민당 연방정당위원회가 열리기 전 드 메지에르 총리는 공동 강령 수립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동독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강령에 표시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본(Bonn) 방문을 계기로 드 메지에르는 양 자매정당의 성장은 공동의 기본위원회와 정관변경위원회를 통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양당의 통일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드 메지에르의 요구는 철회되었고 서독 기민당은 이에 대해 동독 기민당을 병합 하는 것이 아니라 연방화하는 것이라는 점, 본부 사무실을 동베를린으로 이 주하는 것 그리고 동독 기민당의 재산을 새로운 연방 주의 기민당에 골고루 분배하는 것으로 화답을 하였다.
전독 총선이 다가옴에 따라 구 동서독 정당들은 선거 전략의 하나로 통일전 제휴했던 정당들과 합당하게 되었고 이러한 전략적 선택은 먼저 각 주의 전당대회를 통해서 구체화되었다. 그 일례가 바로 1990년 9월 8일 동서 독 베를린의 기민당 지구당들은 베를린 공동주 지구당으로 통합이었다. 또한 이러한 각 주에서의 지구당의 통합은 동독 기민당이 서독 기민당에 합병된다는 인상을 지우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연방차원에서의 통합은 독일의 국가적 통일 직전인 1990년 10월 1일과 2일 함부르크(Hamburg)에서 동독 기민당과 서독 기민당의 통일전당대회를 통해 실현되었다. 또한 기존 기민당 지도부가 전원 사퇴하며 새로운 인물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는데 드 메 지에르는 91%의 찬성표를 얻어 부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동독 기민당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독립적인 정당정책의 수립과 좌파적 성향의 기본토대 구축은 더 이상 실현되지 못하게 되었다. 1990년 10월 서독 기민당의 기본강령이 통합 기민당의 강령으로 적용되었는데 이는 동독 기민당의 요구나 기준이 전혀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합당이라기보다는 합병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크다.
1218호 31면, 2021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