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도착했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그리고 5일 12월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독일에 도착했다. 이렇게 1차 1진 247명을 시작으로 파독 근로자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파독 광부 60주년을 맞아, 1월부터 매월 4 째주 “파독광부 60년” 특집을 이들이 도착한 12월 22일까지 12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린다. -편집자 주
머리말
경제 자립을 목표로 5. 16 군사 혁명정부(박정희 최고회의 의장)가 1961년 12월 13일에 Bonn시에서 「한 서독 경제및 기술협조에 관한 의정서(한국 정부 대표: 정래혁 상공부 장관과 독일: 루젤 베스트릭 경제성 차관이 공동 서명)」를 서로 조인하였다. 한편, 그 이듬해에 처음으로 시작했던 우리나라 「경제 개발 1차 5개년 계획」이 다시 2 차로 이어지는 동안, 「유엔」이 설정한 저개발 도상국 가운데서도 가장 모범적인 국가로 인정받았던 1972 년도 우리나라의 국민 년 간 총소득은 평균 303$에다, 해외 수출 실적도 겨우 16억 8천만 달러에 불과 했다.
또한 1972 년도 수출의 날에 당시 처음으로 1 억불의 수출 실적을 올려서, 대통령으로부터 수출 금자탑을 받은 대표 회사가 바로 지금의 「삼성 기업」이었다.
그 후 수출에 전력을 기울였던 우리나라가 1977 년 12 월 22 일에야 대망의 100 억불 수출 실적을 달성했다.
격세지감이 드는 이야기고 그 수치다.
1964년 3월 17일에 서울과 대만 사이에 첫 해외 항로를 개설했던 「대한 항공(KAL)」이 약 20 년이 지난 1984 년 6 월 19 일에 서독 취항을 기념해서 『사은의 밤』 행사가 「프랑크푸르트」시에서 열렸고, 1985 년을 전후해서 한국의 유수 기업들이 서독에 지사를 설립하고 처음으로 독일 박람회에 참가하며, 국산 상품을 전시하는 조심스런 유럽 시장 개척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한편 한국인 노동력이 서독에 진출한 것은 바로 「제 1차 국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발표된 그 이듬해였던, 1963 년 12월 22일에 독일 광부로 3 년 간 단기 계약을 하고 한국인들의 첫 취업이 시작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1977 년까지 약 15 년 동안 독일에 진출했던 광부는 1, 2 차진(광부 진출이 중도에 일단 중단되었다가 다시 재 파독하였음.), 모두 7, 936 명을 헤아렸다.
1966 년 1월 31일부터는 광부들과 거의 비슷한 3 년간의 계약 조건으로 서독에 파독한 한국 간호사들도 이 후 약 10 여년 사이 동안에 10, 032 명이 이었는데, 그밖에는 원양 어선 선원과 또한 병아리 감별사, 조선 기능 공등 931 명을 합친 총 인원은 모두 18. 899 명을 헤아렸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으로 「한국 외환 은행」이 당시 1 백억원의 자본금(「독일 상업은행(Commerzbank)」가 약 18 % 를 공동출자)로 1967 년 1 월에 설립하고, 약 3 년 후인 1970 년 1 월에 첫 개업을 시작했던 「한국외환은행 을지로 지점」은 순전히 「서독 취업 한국 광부들의 송금」만을 전담하는 전문 은행으로 개점하였던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당시 우리나라가 외환을 확보하려던 노력이 유일하게 서독 취업자들의 송금에만 의존했던 사실을 극명하게 잘 반증해 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독일의 각 지역에서 3 년 간의 단기 광산 계약을 종료하고도, 당시의 취업자 광부들은 국내 정치와 경제 혼란 사정 등등 여러 가지 요인 때문에 장래의 거취 향방을 잃은 채, 어쩔 수 없이 장기 체류하기 시작하였다.
파독광부가 독일에 첫발을 내딛던 그날
1963년 12월 22일 오후 6시, 독일 노드라인-베스트팔렌주 뒤셀도르프시의 ‘뒤셀도르프 공항’. 에어 프랑스 제트기 한 대가 마찰음을 내면서 착륙했다. 비행기는 하루 전인 21일 오전 9시45분 서울 김포공항을 출발, 북극항로를 거쳐 16시간만에 이곳에 닿은 것이다.
탑승객들이 차례차례 내리기 시작했다. 말쑥하게 신사복을 차려 입은 검은 머리의 한국인, 바로 그들이었다. 모두 파독광부 1차1진이었다. 1차1진은 모두 123명. 이들은 독일에 임노동을 제공하기 위해 이역만리를 날아온 것이다.
파독광부들은 비행기 밖에 펼쳐진 풍경에 놀란 듯 트랙에 내려서면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곤 했다. 일부는 소리쳐 환호하기도 했고, 일부는 걱정 어린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파독광부들은 대부분 양복을 입었고, 머리엔 기름까지 바른 이도 있었다. 또 카메라를 목에 걸고 들어오는 사람도 있었다.
독일인의 눈에는 한국인 파독광부들이 어떻게 비쳐졌을까. 어쩌면 ‘맙소사’라는 말로 잘 압축되는 지도 모른다. 작업복을 입은 광산 근로자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국인 광부의 입국 모습을 기억하는 당시 광산회사 간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남정호 재독 언론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처음 한국 광부들이 전세 비행기를 타고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했을 때의 광경이라니…맙소사…머리엔 포마드를 반지르르 바르고 넥타이에다 카메라는 거의 한 대씩 목에다 걸고 트랩을 내려서는데…이건 관광객들인지, 비즈니스맨들인지…(남정호 기자, 「글뤽아우프는 파독광부사에서 애환의 대명사」,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 엮음, 『파독광부 30년사』, 1997, 169쪽).
1963년 12월 22일 독일 뒤셀도르프 공항에 도착한 1차1진 123명은 크게 두 곳으로 분산, 배치됐다. 63명은 북부의 함본 탄광회사에, 나머지 60명은 남부 에슈바일러 탄광회사에 배정됐다.
본과 클뢰크너 광산 중간 사이의 두이스부르크에 위치한 함본 광산은 티센 광업소와 베스텐데 광업소, 로베르크 광업소 등 3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광업소간 거리는 25킬로 안팎. 함본 프리드리히 티센 광산(Friedrich-Thyssen)은 RAG 소속 광산이다. 5개의 샤크트가 있으며, 탄광의 최고 깊이는 1023미터. 1975년 150만톤의 생산량을 기록하다가 1977년 폐광했다. 한편 뒤이스부르크엔 함본 프리드리히 티센 광산뿐만 아니라 RAG 소속의 발줌(Walsum) 광산도 있다. 엄청난 석탄 저장량을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슈바일러 광산은 본에서 남쪽으로 100킬로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매르크슈타인, 오프덴 등 5개 지역으로 분산돼 있다. 이들 광업소간 거리도 20킬로미터에 이른다.
곧이어 5일 뒤인 27일, 1차1진 나머지인 124명이 노동청 심강섭 직업안정국장 직무대리와 대한석탄공사 유항규 기술과장의 인솔을 받아 독일에 왔다. 62명은 북부 에센 탄광회사에, 62명은 북부 클뢰크너 탄광회사에 각각 분산 배치됐다.
클뢰크너 광산은 본에서 북쪽으로 160킬로 떨어진 곳에 있었다. 카스트롭라욱셀과 라우헬 등 2개 지역으로 분산돼 있고, 두 곳 사이의 거리는 40km쯤 됐다.
겔젠키르켄에 위치한 에센 광산은 ‘훈서프리스’ ‘카타리나 엘리자베드’ ‘콘트로드라이피어’ 등 4개 지구로 구분되어 한 도시의 밑을 파내려갔다. 이 4개 회사에서 하루 9000톤의 역청탄이 생산했으며, 보통 한 회사는 지상에서는 1900명, 지하에서는 2000여명의 광부들이 종사했다고 한다. ‘훈서프리스’ 탄광의 경우 지상 3000미터까지 석탄이 있으며 120층으로 북에서 남으로 뻗어 있었다.(최재천, 「서독의 우리광부」,『한국일보 1964년 12월 13일』, 6면 참고)
당시 한국은 1차1진으로 250명을 파독하려 했으나, 247명만이 최종적으로 독일 땅을 밟은 것으로 알려졌다. 2명은 개인사정 때문에 출국하지 못했고, 1명은 서독측에서 입국을 거부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다.
개발시대 한국 경제의 주춧돌을 쌓았던 역사적인 첫 한국인 광부 파독. 이렇게 시작된 한국인 광부 파독은 1977년 10월 26일(2차 47진, 138명)까지 이뤄졌다. (출처 독일아리랑 – 김용출)
1300호 14면, 2023년 1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