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 151
또 다른 명품, 독일 총리들(16)

초대 통일독일 총리 헬무트 콜(Helmut Kohl) ➄

명품 왕국 독일에는 제품·인프라·시스템뿐만 아니라 인물에도 명품이 많다.
경제적으로 ‘라인강의 기적’과 정치적으로 ‘베를린의 기적’을 이끌어온 ‘서독과 통일독일의 연방총리들’이야 말로 나치 정권의 혹독한 시련을 겪은 독일이 길러낸 최고 명장들이며 독일 국민이 만들어낸 최고의 명품이다.
독일의 연방총리를 보면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서독(아데나워)- 시장경제와 경제기적(에르하르트)- 동방정책(빌리 브란트)-동서 데탕트 시대(슈미트)- 유럽 통합과 독일 통일(헬무트 콜)- 노동개혁과 독일병 처방(슈뢰더)- 독일병 치유와 EU 대주주(메르켈) 그리고 현재 올라프 숄츠로 이어지며, 제2차 세계대전 후 건국-분단-냉전-성장-통일-통합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구성되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헬무트 콜(Helmut Josef Michael Kohl, 1930년 4월 3일~2017년 6월 16일)은 1982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의 총리와(1982-90년은 서독, 1990-98년은 통일 독일의 총리) 1973년부터 1998년까지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의 총재를 역임한 정치인이다.

콜의 16년 남짓을 달하는 총리 임기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후 가장 긴 기간이었고, 전 세계 어디에도 민주적인 투표로 당선된 정부수반들 중 그보다 오래 재임한 사람은 없다. 특히 냉전 시대의 종말을 감독하고 독일 통일을 이끈 업적은 널리 칭송 받고 있다.

통일로 가는 길 2

미국, 소련의 장애를 넘고 주변 갬블러들의 견제를 극복해가며 콜이 이뤄낸 기적과 같은 일은 1990년 7월 16일 독소 코카서스 정상회담과 9월 12일 2+4 모스크바 회담이었다.

코카서스 회담은 독일이 소련으로부터 완전한 주권회복과 자율적 의사결정에 따른 통일을 문서로 보장받는 사건이었다. 역사는 이 회담을 ‘코카서스의 기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콜은 회담의 대가로 총 550억 마르크를 지불했다. 여기에는 동독에 주둔하고 있던 소련군의 철수비용, 고향에서의 주택마련 기금 등도 포함되었다.

2+4 모스크바 회담은 동독과 서독, 그리고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총 6개국 외교장관들이 독일의 완전한 주권을 회복시키고 통일을 인정하는 마지막 절차였다. 이를 끝으로 20세기의 대(大)정치게임은 끝났고 콜의 승리로 끝났다.

독소 코카서스 회담과 2+4 모스크바 회담의 주요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통일과 함께 독일에 대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개 전승국의 권리와 책임은 완전 소멸된다. 독일은 통일 시점을 기해 주권을 완전히 회복한다.
  2. 동독 주둔 소련군은 3~4년 과도기 내에 철수한다.
  3. 소련군이 동독 영토에 잔류하는 한 나토 동맹의 동독 확대는 불가하다.
  4. 통일된 독일의 군대를 3~4년 내에 37만 명으로 감축한다.
  5. 통일된 독일은 핵, 화학, 생물무기 제조, 보유 및 처리를 포기하고 비확산 조약(NPT) 회원국으로 남는다.
  6. 독일은 폴란드와의 국경인 오더(Oder) 나이스(Neiss) 국경을 인정한다.
  7. 독일의 통일헌법은 독일군의 군사행동을 금지한다.
  8. 서독 연방군은 통일과 함께 동독 및 베를린에 주둔한다.

한편 1990년 8월 31일에는 통일 조약이 맺어졌고 1990년 9월 20일 두 국회로부터 압도적인 찬성을 받았다. 1990년 10월 3일 동독은 공식적으로 사라졌고 그 영토들은 연방 공화국으로 귀속됐다. 동, 서 베를린은 연방 공화국의 수도로써 다시 합쳐졌다.

통일총리가 되다

통일은 콜을 범접 불가한 위치로 올려놓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이후 처음으로 모든 독일인들이 참가한 1990년 선거에서 콜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며 사선에 성공했다.

12월 2일에 치러진 통일독일 의회와 정부 구성을 위한 총선거에서 콜 총리가 속한 기민련(CDU)・기사련(CSU)이 43.8%를 얻어, 33.5%를 득표한 라폰텐(Lafontaine)의 사민당(SPD)을 제치고 통일 독일의 집권당이 되었고, 콜 총리는 이로서 최초의 통일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한편 1994년 연방 선거 때 콜은 재임에 성공했지만 1990년 선거만큼 많은 표를 받지는 못했다. 또한 독일 사회 민주당이 상원에서 과반수의 자리를 차지하며 콜의 힘을 크게 제한시켰다.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 주에 유럽 중앙 은행이 설립되도록 하는 등 외교적인 부분에서 콜은 더 성공적이었다. 1997년 콜은 유럽을 위한 비전 상을 수상하며 유럽의 단합을 위한 노력을 인정받았다.

1990년 후반에 들어서면서 콜의 인기는 높아지는 실업률 때문에 차차 낮아졌다. 결국 1998년 선거에서 그는 니더작센 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에게 크게 패배했다.

서거

2017년 6월 16일 87세의 나이로 오거스하임 자택에서 서거하였다. 장례식은 7월 1일 유럽 의회가 있는 프랑스 동부의 독일과의 국경 도시 스트라스부르에서 거행되었다. 동서독 통일과 유럽 통합과 화해를 이룬 공적을 기려 유럽 연합(EU)이 처음으로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고인의 뜻에 따라 독일 정부 국장은 행해지지 않고, 장례식은 장클로드 융커 유럽 위원장이 주도하였다. 융커는 “독일을 사랑하고, 동시에 유럽을 사랑하였다”고 그 죽음을 애도하였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등이 참석하여 국가의 틀을 넘어 푸른 EU의 깃발에 휩싸인 관 앞에서 이별을 아쉬워하였다.

장례식은 독일 국가와 함께 EU의 노래로 알려진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 연주로 마무리되었다.

1325호 29면, 2023년 8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