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8월 20일 오전 9시 40분, 조선산악회(회장 송석하)가 이끄는 조사단이 독도에 발을 내디뎠다. 이날 새벽 5시 10분 울릉도 도동항을 출발한 300톤급 해안 경비정 대전환(大田丸)에 조사단 70여명이 몸을 실었다. 독도엔 접안 시설이 없어 동도와 서도 사이에 배를 정박한 뒤, 작은 배로 갈아타고 동도에 상륙했다. 어렵사리 올라간 정상엔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감시초소를 만든 흔적이 남아 있었다. 동도와 서도를 오간 조사단은 50여종의 식물·곤충을 수집했다.
조사단은 동도에 과도정부와 조선산악회 명의의 팻말 2개를 설치했다. ‘조선 울릉도 남면 독도’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대 기념’. 독도가 한국령임을 알리는 첫 시설물이었다. 독도 답사 후 울릉도로 귀환한 조사단은 성인봉 답사 등 울릉도 조사 활동을 마치고 28일 서울에 도착했다. 12박13일의 대장정이었다.
독도조사단은 조선산악회가 주도했지만 미(美)군정청 산하 남조선 과도정부와 경북도청, 경북을 관할하는 제5관구 경찰관까지 포함된 공식 조사 활동이었다. 과도정부를 이끌던 민정장관 안재홍이 신석호 국사관장 등 공식조사단 4명을 파견하면서 산악회에 대규모 학술조사 활동을 부탁했다. 그해 4월 일본인이 독도에 침입해 우리 어선에 총격을 가한 사건에 대응하기 위해서였다.
한국산악회는 각 분야 전문가 63명으로 대규모 조사단을 꾸렸다. 명칭은 ‘울릉도 학술조사대’였지만 독도 조사가 주목적이었다. 사회과학 A·B반, 동·식물학, 농림, 지질광물, 의학, 보도반 등 총 8개 학술반으로 꾸렸다. 단장인 송석하는 저명 민속학자였고, 방종현(국어학) 김원용(고고학) 임창순(역사학) 조중삼(의학) 석주명(곤충학) 등 당대 권위자들이 참여했다.
조선일보는 독도조사단 출발 전부터 시시각각 보도했다. 석 달 전까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홍종인(1903~1998) 조선산악회 부회장이 조사단을 주도했다. 8월 3일 자에 ‘울릉도 학술조사 결행’ 기사를 내보낸 것을 시작으로 ‘울릉도 학술조사대 활동 개시'(22일), ‘성인봉의 분화구 답사'(26일)에 이어 ‘절해의 울릉도’ 기획으로 ‘동해면의 중요 거점, 국가적 재인식이 절대 필요'(9월 3일), ‘생업은 오징어잡이, 비탈에 옥수수는 익는다'(9월 4일)를 보도했다. 홍종인은 9월 21일부터 ‘한성일보’에 ‘조사단 공식 보고서’를 네 차례 기고했다. 안재홍이 사장으로 있던 신문으로, 과도정부의 준(準)기관지였다. ‘(독도 조사 직전까지) 외부 발표를 종시 보류하고 있었으나 이는 우리가 애초부터 계획해온 기습의 행정’이라고 썼다. ‘독도 1947’을 쓴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는 ‘울릉도 조사를 표면에 내세우고 독도를 조사한다는 계획은 과도정부 차원에서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홍종인은 이듬해 6월 미군기의 독도 연습 폭격이 사회문제가 되자 조선일보 6월 17일 자에 ‘동해의 내 국토’란 기명 기사를 실었다. ‘지금도 독도 동편 섬에는 우리 산악회와 과도정부 조사대가 세운 뚜렷한 표말이 서 있을 것’이라고 썼다. 조선산악회는 1953년 10월 독도 조사에 나서 표석(標石)을 세웠다. 조선일보 주필로 있던 홍종인은 신문에 네 차례 독도 답사기를 실었다. 1956년에도 고교 산악부 학생 197명을 이끌고 독도를 찾았고, ‘항해 1천 마일/학도해양훈련기'(1956년 8월 22~30일)를 조선일보에 여덟 차례 연재했다. 홍종인은 1956년 10월 24일 자 조선일보 칼럼 ‘울릉도와 독도’에 이렇게 썼다. ‘독도를 알려면 울릉도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울릉도는 산업상, 국방상 특수한 존재라는 것만으로도 다른 곳과 따로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앞날을 내다본 탁견이었다.
2020년 4월 17일, 1167호 29-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