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회] 해로(HeRo) 특별 연재 – 담장 안에 작은 정원을 보았네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

2015년에 시작된 HeRo(해로)는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늙어가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코멘트에서 출발했다. 해답은 늘 사람이었다. 그야말로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도움활동의 필요성으로 귀결되었다. <해로>의 입술로 연재를 시작하지만,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재독 동포들의 목소리를 그릇에 담으려 한다. 이 글이 고단한 삶의 여정을 걷는 이들에게 도움의 입구가 되길 바란다(필자 주)

6회 / B환우와 나, 그리고 지희

B환우의 방문길은 가뿐했다. 집안일을 돕는 것 외에도 어르신의 지나온 삶을 듣는 건 나에겐 선물같은 환희였다. 그분 인생의 칠십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올린 경험의 성상을, 한참 어린 내가 오롯이 받기엔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 정도였다.

홀로 사는 어르신이라 집은 넓지 않았다. 두 평 남짓한 거실엔 노년의 고독을 달래줄 텔레비전이 웅웅소리를 내고 있었다. 구석엔 오랜 흔적을 간직한 듯한 장식장이 주인처럼 자리했다.

환우가 준비해놓은 따끈한 차 한 잔에 몸을 녹였다. 몸이 불편해 아주 천천히 준비해놓았을 터였다. 보답하는 마음으로 아주 성실하게 자스민차 향에 마음을 실었다. 카페트를 청소했고, 화장실을 정리했다.

B환우는 오른쪽 다리가 약간 불편한 분이다. 사실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드리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을 드리기 위해서였다.

<해로>에서는 몸이 불편한 환우를 위해 정기적으로 방문해 집안일을 도와준다.

오늘은 평소보다 빨리 끝났다. 일반 자원봉사 교육을 수료한 지희 씨와 함께여서였다. 지희는40대 여성으로 한국에서 심리학을 공부한 인재다. 그 분야에서 일하다 1년 전쯤 아이들과 독일에 왔다. 교육 때부터 성실했고 열성적이어서 눈길이 갔던 여성이었다. 앞으로 지희 씨가 B 환우의 집안일을 돕기 위해 방문할 예정이다. 누군가를 돕는 일을 처음 해본다,는 지희는 봉사에 대한 동기부여의 드라이브가 강하게 작동하는 듯했다. 초심자의 행운이다.

<해로>에서는 지난해 7월부터 베를린 시 정부로부터 Unterstutzung im Alltag(운터슈티충 임 알탁) 허가단체로 인정받았다. 번역 그대로 ‚일상생활에서의 도움활동‘이다. 요양등급을 받고 있는 재가형 환우들을 위한 도움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독일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요양급여(Pflegegrad) 제도가 있다. 환우상태에 따라 1등급부터 5등급까지 나뉜다. MDK에서 방문한 의료전문가의 평가를 통해 환우 병증상태에 따라 등급을 매긴다. 1등급은 가장 경미하고 매달 장기요양보험에서 지원된 125유로 상당의 도움 서비스만 받을 수 있다. 2등급부터는 도움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125유로 외에 현금급여 316유로, 3등급은 545유로 등 환우등급별 5등급까지 차등 지급된다. <해로>는 125유로 한도 내에서 도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식 기관인 셈이다.

일반 자원봉사자들은 이를 위해 40시간의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교육 후에는 환우 집을 방문해 환우가 미처 할 수 없는 집안일이나 산책, 장보기 등을 대신해주기도 한다. 그야말로 삶 속에 들어가 필요를 채워주는 일이다. 따라서 해로의 활동은 생활적인 도움에서 출발해 마지막 삶을 영위하는 호스피스 활동까지 인생 전반에 걸쳐 진행된다.

웰다잉을 호스피스 영역이라 한다면 웰리빙은 Untestutzung im Alltag(일상 생활 속 도움) 분야다. 해로는 웰리빙(Well Living)과 웰다잉(Well Dying)을 아우르는 전천후 서비스를 제공한다. 즉 1세대 어르신의 나이 듦과 마지막을 함께 하는 것과 동시에 삶에 있어서도 삶의 질을 높이는 체감형 돌봄형태를 구현한다. B 환우를 위한 활동은 이러한 웰리빙 차원의 봉사라고 볼 수 있다.

B 환우는 깨끗해진 거실과 욕실을 둘러본 후, 나와 지희의 손을 잡아 거실로 이끌었다. B의 이야기는 절반을 넘어선 내 인생을 곰곰히 생각하게 했다. 나는 B환우 스스로 막아놓은 인생의 작은 담장을 넘어 담장 안에 있는 아름다운 정원을 보았다. 문득 윌리엄 모리스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수선화와 빨간 장미로 뒤덮인 작은 담장 안에 있는 정원을

나는 알고 있네. 이슬 맺힌 새벽부터 이슬 맺힌 밤까지

그곳에서 나는 내가 원하면 함께 배회할 사람이 있네“

B환우는 인생에서 함께 자신의 정원을 배회할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새벽부터 이슬맺힌 밤까지. 그래서인지B 환우의 웃음은 고통으로부터 오래전 벗어난 초연함이 보였다. 그를 만난 후 성찰은 경이로웠다. 어쩌면 나와 지희, 그리고 우리 모두 인생에서 우리와 함께할 누군가와 이미 배회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돌아오는 길이 더 가뿐해졌다.

박경란/ 사단법인 <해로> 일반 자원봉사팀장(후원문의:info@heroberlin.de)

2020년 3월 27일, 1164호 1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