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야기-(14)

독일에서는 1918년 항구도시 킬(Kiel)에서 전쟁에 대한 불만을 가진 수병들의 폭동으로 혁명이 시작되었다.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났고, 독일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군과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승전국들은 빌헬름 2세를 오스트리아 왕처럼 전쟁의 책임을 물어 법정에 세우고 재산을 몰수하려 했지만, 네덜란드가 그의 반환을 거절했다. 빌헬름 2세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3세(1831-1888)로 왕세자로만 27년을 기다렸고, 기다리는 동안에 있었던 세 번(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의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할아버지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와 독일 통일을 했던 사람이다. 빌헬름 1세(1797-1888)가 90세로 죽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3세가 99일 동안 왕위에 머물다가 암으로 죽었고, 아들 빌헬름 2세가 그 뒤를 이어 황제로 올랐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책임을 물어 추방당했고, 네덜란드에서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독일왕정도 끝이 나고 말았다.

전후 패전국인 독일에 전달된 계산서는 두껍고 무거웠다. 재무장 금지, 전쟁배상금 320억 달러, 그리고 알자스-로렌지방 반환 등이었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종교전쟁 때(1618-1648) 프랑스가 빼앗아갔던 독일 땅으로, 비스마르크가 1871년에 다시 찾아온 땅이다. 우리에겐 ‘마지막 수업’으로 더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윌슨은 파리평화회담에서 국제연맹을 조직해 앞으로 국제적인 문제나 분쟁은 평화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해결하자고 주장했다. 미국 스스로도 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려면 미국의회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 다시 다수파가 된 공화당의 반대로 의회동의가 어렵게 되자, 윌슨은 여론에 직접호소하기 위해 전국순회연설을 하고 있었다. 콜로라도 주 연설 중, 윌슨은 저격수의 총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었고, 그 사고로 임기 내내 병원신세를 졌다.

미국이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국은 시끄러웠다.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로 폭력과 증오가 난무하는 공포에 뒤덮였다. 1920년에 500여 명의 흑인들이 죽거나 다쳤고, 흥분한 대중은 전쟁 중에 일어났던 소비에트연방의 볼세비키 혁명을 보고 듣고 배웠다. 미국에서도 자본가 타도! 사회주의국가 건설을 외치면서 공산당폭력이 시작되었다. 공산당 탄압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기업인들은 정부를 도왔고, 정치인들이 반대하던 합병과 독점을 은밀하게 추진했다.

1920년 라디오가 처음으로 발명되자, 미국의 대통령선거는 이제 라디오를 통해 연설을 하기 시작했고, 1930년 대에는 40%가 넘는 미국의 가정들이 라디오를 가졌다. 헨리 포드는 1914년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해 2분에 한대씩 자동차를 만들어 판매함으로써 전 세계자동차시장 절반을 포드자동차가 독차지했다. 1차 세계대전에 남자들이 전쟁터로 동원되자, 여자들은 공장으로 동원되었다. 사회활동을 시작한 여자들의 여권이 차차 신장되어가더니, 마침내 1918년에는 미국의 18개 주에서 여자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고, 1919년에는 미국전역에 확대되었다.

조직폭력배두목 알 카포네(1899-1947)는 시카고를 주무대로 밀주, 도박, 매춘 등으로 엄청난 돈을 모아 역사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긴 나폴리(이태리)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 1929년 10월 24일 주식시장은 한꺼번에 ‘팔자’로 돌아서면서 곤두박질쳤다. 대폭락으로 증권은 휴지조각이 되었고, 역사는 그날을 ‘암흑의 목요일’로 기록했다. 그 후 10년에 가까운 무섭고 혹독한 대공항의 시대가 미국을 강타했다. 대규모 전쟁으로 무한정 물건을 만들어 팔다가, 팔 곳이 없어지자, 미국경제는 쑥대밭이 되었다.

미국 대공황 당시

공장은 가동이 중단되었고, 농산물은 썩어나갔으며, 주린 배를 움켜잡고 일자리를 찾는 실업자로 넘쳐났다. 미국의 은행들은 한꺼번에 쓰러졌고, 세계최고의 부자나라가 하루아침에 세계최악의 거지나라로 전락했다. 전쟁이 끝나고 새로운 설비, 건설이 부진해지면서 경제성장이 둔화되자, 기업들의 여유자금은 증권시장으로 몰렸고, 주식값이 폭등해 실제 가치보다 10배가 더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는 거품현상이 일어났다.

어느 날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갑자기 ‘사자’에서 ‘팔자’로 돌아서자, 주식은 하루아침에 폭락했고 기업과 개인들은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1932년 실업률이 35%였고, 굶어 죽는 미국사람들이 길거리에 즐비하게 널려있었다. 정부가 경제에 간섭하지 않고, 시장의 원칙에만 맡겨두는 자유방임주의로 흘러가면 빈부의 격차가 심해졌다.

1932년 대통령선거에서 후버와 루스벨트가 대결했다. 후버는 떠벌리기만 하는 계획 없는 낙관론자였고, 루스벨트는 새로운 정책(New Deal)을 주장했다. 루스벨트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취임사에서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입니다. 우린 그걸 우리 맘속에서 몰아내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제일 먼저 파산 직전의 미국경제와 굶주리는 국민들에게 구호(Relief) 하는 일을 시작했고, 그 다음으로 국가, 기업, 개인의 경제회복(Recover)을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며, 마지막 세 번째로 개혁(Reform)을 단행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제일먼저 한 일은 3월 4일 취임식이 끝난 그 다음날(5일) 연설을 하는 일이었다. “3월 5일부터 3일 간 전국에 있는 모든 은행 문을 닫겠다”는 ‘비상조치’를 통고하는 연설이었다. 돈의 인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미국국민들은 자기 돈이 없어질 까봐 너도나도 예금을 인출해가는 바람에 은행들이 힘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그 유명한 ‘노변담화’를 통해, “국민 여러분! 어느 누구도 이 나라에서 굶주려서는 안 됩니다. 국민여분은 정부와 은행을 믿으십시오, 그 믿음만이 여러분들의 예금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가 국민을 설득하는 이 연설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었고, 그의 연설에 감동한 국민들은 찾아갔던 돈을 들고 너도나도 다시 은행을 찾았다. 그리고 미국은 다시 살아났다.

루스벨트가 이루었던 성공은 사유경제, 사유재산 보호를 주장하는 자본주의 경제의 틀은 그대로 지키면서, 사고와 인식의 대변혁을 가져온 개념의 혁명이었고, 관념의 혁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유방임주의로 일관했던 정부를 좋아했던 기업들은 정부 없이 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고, 정부도 노동자의 권익보다 기업인들의 이익만 도와주었던 과거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노동자와 고용주의 대결이 아니라, 양쪽이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만든 단체들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기업, 고용주, 정부가 똑같이 인식하게 되었다.

참조 : 먼 나라 이웃나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참조

2019년 10월 4일, 1141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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