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소녀상 작가 베를린 간담회 후기

-순이, 용이, 아리, 누진, 순이, 그레타, 독일 소녀상의 다양한 이름들

지난 토요일(9월 17일), 소녀상 작가 김서경, 김운성이 드디어 베를린 소녀상과 다시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

소녀상이 전시되는 볼프스부르크 전시 개막식과 <카셀 도큐멘타> 작가 간담회, 카셀대학 카셀소녀상 동판 전달식, 프랑크푸르트 라인마인한인교회 간담회, 그리고 네팔-히말라야 공원 소녀상 방문까지 약 2주 간의 숨가쁜 일정을 마치고 베를린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 간담회가 열린 코리아협의회 사무실은 작가들의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김서경은 본인들의 힘만으로는 소녀상이 세상에 나올 수 없었다며,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해온 활동가들, 시민들, 피해할머님들, 그리고 소녀상 옆 빈 의자에 앉아본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입을 열었다. 현재까지 설립된 평화의 소녀상은 국내에만 131곳, 지역에 따라 형태가 다른 경우도 있는데 그 중 두 작가가 제작한 소녀상은 82개에 이른다.

해외에 설립된 평화비는 총 18곳으로, 최근에 설립된 카셀소녀상은 국내외를 합쳐 작가들의 99번째 소녀상이다. (소녀상 모습이 아닌 동상까지 포함한 숫자, 평화비 형태가 아닌 기림비는 해외 총 32곳).

후원인들의 이름을 새긴 카셀소녀상 동판 전달식(9월 10일)

소녀상 제작의 단초는 당시 일본군 ‘위안부’운동을 주도했던 <정대협>(현 <정의연>)으로 2011년, 1,000번째 수요시위 기념물로 비석 제작을 의뢰해온 것이다. 비석을 디자인하는 중에 비석 설립을 저지하려는 일본 측의 압력이 들어왔다. 작가들은 그때 ‘아, 비석 갖고는 안 되겠다. 가해국가가 피해국가에게 왜 이렇게 행동하고, 왜 이런 걸 요구하는가.’ 생각하며 뭔가 본격적으로, 제대로 대항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피해할머님들의 당시 나이였던 소녀 하나만 동상으로 제작해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수요시위에 나온 할머님들, 정대협 활동가들과 만나면서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다. 모든 스케치를 끝내고 뭔가 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할머니 그림자를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딸의 즉석 제안에 마지막으로 그림자가 탄생했다.

소녀상 바닥에 있는 그림자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환생 후의 삶에 대한 상징인 하얀 나비도 들어가 있다. 작가는 이어 사실 소녀상은 이 최초의 소녀상 1개로 끝날 일이었지만, 일본이 계속해서 철거 요구를 하거나 외압을 행사하자 세계로, 국내 각지로 확산이 된 것이고 결국 비젠트와 프랑크푸르트, 베를린, 카셀까지 세워지게 된 셈이라고 했다.

설립 열흘 만에 철거 명령을 받았던 베를린 소녀상과 설립된 지 이틀 만에 자국 정부에 의해 철거된 필리핀 평화비, 역사를 부정하는 현지 한인들의 반대로 무산된 애틀랜타, 최근 철거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충남대 소녀상까지. 소녀상은 여전히 어딘가에 세워지고 있거나 설립이 준비중이다. 물론 설립이 가시화되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일본 측의 압력과 방해공작도 뒤따른다.

소녀상은 피해할머님들을 대신하는 상징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런 시간들을 지나오면서 현재의 이야기까지 담아내고 있는데, 이렇듯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건 작가들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이라 했다.

독일의 소녀상은 작가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냐는 질문이 들어왔다. 독일 소녀상들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드문 사례로 각각의 소녀상마다 이름이 있다고 답하자 행사장에 웃음이 터졌다.

볼프스부르크 전시장에서의 소녀상 작가 김서경

베를린소녀상 플라스틱 버전은 ‘용이’, 청동 소녀상은 ‘아리’(아르메니아어로 ‘용기’), 카셀소녀상은 ‘누진’(쿠르드어 ‘새로운 삶’), 비젠트 소녀상은 안점순 할머님의 이름을 딴 ‘순이’. 그런가 하면 이번 볼프스부르크 전시장에서 만난 소피라는 아이는 소녀상이 너무 예쁘고, 잘 만들어졌다며 한참을 쓰다듬더니 ‘그레타’란 이름을 즉석에서 지어주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레타는 고희랍어로 ‘빛의 아이”라는 뜻으로 아침이슬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이 구슬같다고 표현한 데서 유래했다.

독일 소녀상의 특별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다. 2018년, 독일 개신교 교회의날 행사에 방문했을 때 한 독일인 목사님은 작가들을 향해 독일의 과거사 청산 (남미비아 식민주의 청산, 아우슈비츠 여성수감자들의 가스실로 보내지기 전의 성폭력, 연합군에 의한 전시 여성 성범죄 등)을 약속하여 깊은 감동을 선사하기도 했다. 독일은 독일식대로 소녀상의 가치를 느끼고 있다는 데서 오는 감동이었다.

간담회의 한 청중이, 소녀상의 빈 의자는 독일인들에게 있어 곁에 있었던 사람이 사라졌다는 의미로 ‘홀로코스트’를 의미해서 옆에 앉는 것은 무례하게 느낀다고 하자, 작가는 빈 의자는 먼저 돌아가신 피해자들을 기억하는 자리지만, 누군가 그 자리에 앉았을 때 비로소 소녀상 전체가 완성된다며 빈 의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끝으로 그들은 누군가에게 침묵을 강요한 고통을 기록하는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며 향후 계획을 밝혔다. 민주화운동과 동학, 5.18과 4.3항쟁 등을 주제로 작업해오던 두 작가 역시 소녀상을 만난 이후로 이렇게 더욱더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소녀상 작가들의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1284호 17면, 2022년 9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