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20)

역사의 블랙박스, 묘지석을 찾아라

묘지석은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

일본 국립도쿄박물관 동양관 5층 한국문화재 전시실에는 고려시대의 장군 최충헌의 묘지석이 있다. 고려 무신 집권기 최고의 실권자인 최충헌의 묘지석이 어떻게 도쿄박물관에 있는지에 대해 알려진 바는 없다.

도쿄박물관의 최충헌 묘지석

다만 일제강점기 당시 공민왕릉 도굴 등 고려 왕도인 개성 일원을 발굴조사한 일본인들이 반출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묘지석은 부장품의 하나다. 부장품이란 장사 지낼 때 시신과 함께 묻는 물건들을 이르는데 도굴로 출토되거나 도난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 도굴이나 도난 외에 무덤 밖에서 묘지석을 본다면 이는 산소를 이장(移葬)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것을 다른 장소에 보관하거나, 묘지석을 제작하면서 하나가 아닌 여러 개를 만들어 따로 보관하는 경우이다.

묘지석은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이름, 출생기록 등과 신분, 생전의 행적 그리고 묘소의 소재와 묘지석을 제작한 사람들을 기록해 무덤앞에 함께 묻는다. 묘지석은 중국 동한 시기에 시작된 이후 크게 성행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는 고려시대 이후의 것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재질로는 검은 돌(烏石)이나 네모진 석판(石板)이 사용되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자기로 된 도판이 널리 쓰이게 되었다. 특히 흰색 바탕에 청색으로 글씨를 쓴 청화백자(靑畵白磁) 계열의 묘지석이 많이 쓰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모양도 원통형, 사각형, 표주형, 묘지모양 등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현재 가장 오래된 묘지석은 충남 공주에서 출토된 백제 제25대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이다.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은 무령왕과 왕비의 것으로 두 점이다. 이 지석은 왕릉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밝혀 주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이런 연유로 묘지석 중에 국보로 지정된 유일한 사례이다.

무령왕릉 지석의 가치는 지석에 기록된 내용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지석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무령왕의 일생에 대해 설왕설래를 벌였다. 하지만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이 62세 되던 계묘년 5월 7일에 붕어하시고 을사년 8월 12일에 대묘에 예를 갖춰 안장하고 이와 같이 기록한다”라는 묘지석의 내용으로 무령왕이 523년 5월에 사망했고 525년 8월에 왕릉에 안치되었으며,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해 529년 2월에 묘지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일본서기』에서 461년, 일본 규슈 가라쓰 가카라시마의 해변 동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도 지석의 내용과 『일본서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로써 무령왕은 제27대 위덕왕과 함께 출생의 기록과 사망한 날짜 등이 밝혀진 아주 드문 경우에 속하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묘지석은 역사의 블랙박스라고 할 수 있다.

미국으로 간 조선 문신 정필의 묘지석

2019년 10월, 문화유산회복재단 조사단은 미국 LA에 있는 한 갤러리를 방문했다. 갤러리는 한인타운의 중심지에 있었다. 관장은 재미동포 데이빗 리(한국 이름 이창수)라는 사업가였다.

자동차 관련 사업을 하는 리 관장은 조국을 떠나 타국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지만 자녀들에게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해 알려주고 싶어했다. 고민하던 차에 한국의 문화재가 교육에 효과가 있겠다 싶어 미국은 물론 영국 등지의 소장자와 경매장을 찾아다니며 문화재를 수집했다. 그러던 중 미국인 소장자에게서 도자기로 제작한 도판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찾아가 만난 것이 ‘정필의 묘지석’이었다 한다.

정호가 쓴 정필의 묘지석

1639년(인조17) 충주에서 태어난 정필(鄭泌)은 1699년(숙종 25) 경기전 참봉이 된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상의원 별제를 지냈다. 1708년(숙종 34) 69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정필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옥여(玉汝),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정경연(鄭慶演), 어머니는 사간원 정언을 지낸 이직(李稷)의 딸이다. 고조부가 「관동별곡」, 「사미인곡」 등 조선 가사 문학의 대가이자 조선 선조 때 좌의정을 지낸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이다.

묘지석에서 찾은 그의 가계도이자 이력이다. 묘지석은 그의 동생인 장암 정호(鄭澔)가 형인 정필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의 삶을 기리는 글을 묘지석에 썼다. 정호는 영조 때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했다.

이처럼 묘지석은 고인(故人)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 상황이나 제도, 문화 등을 고증해 주는 소중한 역사기록 자원이다. 백제 유민이라 불리는 흑치상지 장군의 묘지석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알려진 역사의 기록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다. 묘지석은 이처럼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쓰일 수 있다.

1269호 30면, 2022년 6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