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원 박사와 둘러보는 문화와 문화 사이를 잇는 다양한 현장들
지난달 토요일(7월 11일) 오전, 루르 보훔 대학교(Ruhr-Universität Bochum, RUB) 오디맥스 앞은 이른 시간부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전역에서 모인 교사들로 붐볐다. 2018년부터 2년마다 열려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은 “RUB 교사의 날”에는 이날 하루 동안 250여 명의 교사, 교생 및 연수생, 교과 담당관, 행정 교사들이 캠퍼스를 찾았다. 개회사와 기조강연, 음악 공연으로 하루를 연 행사는 오전•오후 두 차례의 연수 세션과 캠퍼스 곳곳의 “마켓플라츠(Marktplatz)” 전시, 그리고 저녁의 친교 모임까지 이어지는 종일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그 마켓플라츠 한쪽, 사람들이 가장 오래 발걸음을 멈춘 부스 중 하나가 있었다. 보훔대 한국학과 학생들이 마련한 이 부스의 이름은 “다언어 가시성 — 한국어를 사례로 한 언어경관 수업자료(Mehrsprachigkeit sichtbar machen: Linguistic Landscape als Unterrichtsmaterial am Beispiel der koreanischen Sprache)”였다. 포스터와 전시물, 노트북으로 시연되는 디지털 지도 앞에서 교사들은 걸음을 멈추고,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한참을 머물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가 끝날 무렵 학생들은 지치고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지만, 표정에는 뿌듯함이 역력했다.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이라는 렌즈로 본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한국어
언어경관이란 우리가 공공장소에서 마주치는 언어들 — 상점 간판, 메뉴판, 광고, 진열창, 공공 안내문 — 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언어는 말하고 쓰는 것에 그치지 않고, 눈에도 보인다. 이 전제 위에서, 한국어 언어경관 프로젝트에 참여한 보훔대 한국학과 학생들은 스스로 연구자가 되어 뒤셀도르프, 쾰른, 도르트문트, 에센, 보훔, 아헨, 본, 뒤스부르크 등 NRW 8개 도시를 직접 누비며 한국계 상점과 문화공간을 관찰하고, 상인과 주민을 인터뷰하고, 한국어 간판과 표지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이렇게 수집한 자료는 ArcGIS 스토리맵이라는 공공 연구 아카이브로 완성되었다. 이 아카이브는 “여러분의 도시를 교실로 만들어보세요. 모든 간판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Jedes Schild erzählt eine Geschichte)”라는 슬로건으로 교육 현장에서 곧바로 활용 가능한 자료로 재탄생시켜서 그날 방문한 교사들에게 소개되었다.
NRW 교사들이 마켓플라츠에서 만난 것들
마켓플라츠 부스는 개방형으로 운영되어, 지나가는 교사들과 소그룹 대화가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화학, 물리, 정보학 교사부터 어학 교사, 역사•지리•사회 교사, 성인교육기관(Volkshochschule) 관계자까지 다양한 배경의 교육자들이 부스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학생들이 기억을 더듬어 정리해 남긴 교사들의 목소리를, 아래에서는 원래의 뉘앙스를 살려 그대로 전한다.
이날 가장 먼저 학생들을 격려한 것은 다름 아닌 행사 주관 기관인 교사교육기관(PSE)의 부총괄 책임자였다.
“환상적인 프로젝트입니다!(Fantastisches Projekt!)”
크리스티아네 마티슨 박사(Dr. Christiane Mattiesson, Professional School of Education 교사교육기관 부총괄 책임자)는 PSE가 학생들의 해외 체류 학기를 장려하고 있으며, 이런 프로젝트가 그러한 목표를 뒷받침하거나, 적어도 학생들이 다른 문화와 언어에 관심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러한 시도를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대박이네요!(Bombe!)”
도르트문트의 알렉산드라 휘저 교사(Alexandra Hüser, Robert Schuman Berufskolleg Dortmund, 영어•독일어 담당)는 짧은 감탄사로 프로젝트에 대한 첫인상을 전했다. 그는 이어 독일어(DaZ, 제2언어로서의 독일어) 수업을 통해 많은 이주 배경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며, “이 프로젝트는 제 학생들에게도 흥미로울 것 같아요. 현재 살고 있는 도시 안에 언어가 어디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을 테니까요”라고 말했다.
에센 성인교육원(VHS Essen)에서 역사와 독일어를 가르치는 아이누르 테르지 교사(Aynur Terzi, 역사 및 독일어과정 책임자)는 “매우 흥미롭다”는 소감과 함께, VHS 에센이 과거 한국인 파독 간호사와 광부를 주제로 한 전시회를 연 적이 있으며, 전시 당일 실제로 파독 간호사와 광부 출신 어르신들이 찾아왔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같은 기관의 라우라 스크리치팍(Laura Skrzypczak) 프로그램 책임자는 한발 더 나아가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은 사실 예전부터 파독 근로자로 왔고 에센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독일사회가 그들에게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 쏠린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터키 출신 파독 노동자를 다룬 전시는 많지만요… 그래서 한국 파독 간호사와 광부에 관한 전시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에센 라이프니츠 김나지움의 발레리아 그뤼츠 교사(Valeria Grütz, Leibniz Gymnasium Essen, 프랑스어•수학)는 “다언어라는 측면에서 특히 흥미롭다”고 평가하며, 자신이 가르치는 프랑스어 역시 학생들이 일상 속에서 얼마나 자주 접하고 있는지 잘 인식하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에센 알텐에센의 정보학 교사 마리암 페이크리쉬빌리(Mariam Peikrishvilli, Essen-Altenessen)는 “선택교과(WP)로 상급 학년 학생들에게 매우 좋은 프로젝트가 될 것”이라며 실제 교과 편성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모든 반응이 전적으로 낙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메트만 네안더탈 직업전문학교의 유타 아이히호른 교사(Jutta Eichhorn, Berufskolleg Neandertal Mettmann)는 젊은 세대 사이에서 한국의 인기가 뚜렷이 높아지고 있음을 체감한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다들 캐나다로 가고 싶어 했는데, 요즘은 한국으로 교환을 가고 싶어 하는 학생들도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냉정한 현실도 짚었다.
“프로젝트 자체는 정말 흥미롭게 들립니다. 그런데 저는 학생들이 겨우 졸업장을 받도록 뒤쫓아다녀야 하는 직업전문학교에 있습니다. 이런 프로젝트는 이론적으로는 정말 훌륭하죠. 여기 모여서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자분들도 다들 좋은 아이디어를 갖고 계시고요. 그런데 학교의 일상이 실제로 어떤지 아십니까? 교사도, 시간도, 학생들이 이런 활동에 참여하도록 동기를 부여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학생들은 이 발언을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기록해 남겼다.
조스트의 크리스티안-롤프스 실업학교(Christian-Rohlfs-Realschule, Soest,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담당) 교사는 “이 프로젝트가 매우 흥미롭다”, “나도 이런 방향의 활동을 직접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데이터 수집 측면이 인상 깊었다”고 전했다.
하겐의 크리스티안-롤프스 김나지움(Christian-Rohlfs-Gymnasium, Hagen, 영어•철학 담당) 교사는 음식과 패션, 스킨케어 등을 통해 한국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을 실감한다고 말했다. 한국어에 익숙한 한 사회복지사(Sozialarbeiterin)는 “이제는 독일 슈퍼마켓에서도 떡볶이를 살 수 있다”고 말하며 공공장소의 언어를 조사한다는 이 프로젝트의 방식 자체가 흥미롭다고 평했다.
뒤스부르크의 한 김나지움(Gymnasium, Duisburg, 스페인어•프랑스어, 역사•종교 담당) 교사들은 “프로젝트 수업형식으로 학교에서 직접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사람들은 한식을 먹으려면 뒤스부르크나 오버하우젠보다는 뒤셀도르프로 가는 경향이 있다”, “뒤스부르크와 오버하우젠에는 한국계 상점이 거의 없다”는 지역적 관찰을 전했다. 동시에 “한국 스킨케어와 한식이 이제 훨씬 더 눈에 띈다”는 변화도 함께 짚었다.
부퍼탈•졸링엔의 베르기셰 성인교육원(Bergische Volkshochschule, B-VHS Wuppertal/Solingen, 수학•물리 담당) 소속 마르틴 묄레 교사(Martin Möhle)는 이러한 프로젝트를 자신이 속한 기관에서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며, “한 문화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음식을 통하는 것”이라는 인상적인 소감을 남겼다. 겔젠키르헨 리카르다-후흐 김나지움(Ricarda-Huch-Gymnasium, Gelsenkirchen, 독일어•지리 담당) 교사는 학생들을 통해 K-팝의 인기와 한국에 대한 전반적 관심이 커지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며, Survey123 같은 도구로 다양한 연령대의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다는 점을 특히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보훔대학교의 한 학생 조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틱톡 등 소셜미디어에서의 한국어 언어경관도 함께 조사해볼 수 있지 않겠냐는 흥미로운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이날의 진짜 주인공은 단연 부스를 운영한 보훔대 한국학과 학생들이었다. 먼저 에니세(Enise) 학생은 처음의 긴장을 이렇게 떠올렸다.

“행사 시작 전에는 무척 긴장했어요. 그런데 먼저 ‘어떤 과목을 가르치시나요?’라고 질문하니 선생님들이 훨씬 편하게 대화를 이어가셨고, 자연스럽게 우리 연구를 학교에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할 수 있었어요.” 그는 많은 교사가 NRW를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본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일부 경력 교사들은 교육과정과 예산 문제를 현실적인 고민으로 언급했지만, 전반적으로는 프로젝트에 큰 관심을 보였다고 전했다.
잉에(Inge) 학생은 이날을 “완벽한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거의 모든 선생님이 한국 문화를 한 번쯤은 접해본 경험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또 언어와 관계없는 과목의 교사들까지 우리 프로젝트를 자신의 수업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 정말 즐거웠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두려웠지만, 대화를 시작하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다고 덧붙였다.
미셸(Michele) 학생 역시 예상보다 훨씬 큰 관심을 체감했다. “생각보다 훨씬 많은 분이 우리 프로젝트를 끝까지 들어주시고, 자신의 학교에서도 해보고 싶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처음에는 설명이 잘 될까 걱정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신감이 생겼고, 더 많은 분께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일이 즐거워졌습니다.”
스토리맵의 시연을 맡은 리사(Lisa) 학생도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선생님들이 스토리맵을 직접 다루어 보면서 통계와 이야기를 살펴보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은 매우 높았지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우리 프로젝트가 새로운 문화를 발견하는 첫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국어 언어경관 프로젝트가 특히 주목받은 이유는 연구 결과를 곧바로 수업에 활용할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연결했다는 점이다. ‘언어 탐정(Sprachdetektive)’, ‘간판을 통해 문화 발견하기(Kultur durch Schilder entdecken)’, ‘나만의 연구 프로젝트(Eigenes Forschungsprojekt)’ 등은 독일어, 외국어, DaZ/DaF, 사회과학, 지리 등 다양한 교과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수업 모델로 제시되었다.


행사장 배너에는 “도시는 배움의 자료로 가득 차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할 뿐”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지난 몇 달간 보훔대 한국학과 학생들이 뒤셀도르프, 쾰른, 에센, 본, 뒤스부르크, 아헨, 보훔, 도르트문트를 직접 누비며 기록한 한국어 간판들은 이제 연구 자료를 넘어 NRW 학교 현장에서 활용될 교육 콘텐츠로 이어지고 있다.
이번 교사의 날은 한국어 간판이 단순한 거리 풍경이 아니라 한인 공동체의 역사와 현재를 담은 교육 자료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자리였다. 여러 학교와 성인교육기관에서 직접 프로젝트를 진행해 보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그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대학에서 시작된 작은 현장 연구가 앞으로 더 많은 교실과 학생들을 만나며, 지역사회의 다양성을 배우는 새로운 교육 모델로 확장될지 기대가 된다.
1470호 20면, 2026년 8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