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이해하자

독일의 금융시스템 ➁

금융의 핵심적 역할은 민간부문의 잉여자금을 조달하여 자금이 필요한 부문에 배분하는 것이다. 이 역할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경제는 동맥경화현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과도한 버블로 인하여 경제에 심각한 충격을 주기도 한다. 글로벌 금융위기나 유럽의 재정위기는 바로 이러한 금융의 불안정 속에서 촉발되었다.

그러나 독일 경제는 동시다발적 위기 상황 속에서도 유럽 경제의 안전판 역할과 함께 안정적인 성장을 구가하고 있다.

독일은 자본시장과 펀드산업 등의 활성화보다는 은행 중심으로 작동되는 금융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독일의 주식시장, 채권시장, 펀드, 벤처캐피털의 GDP 대비 규모가 영미국가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 비해서도 크게 낮다. 예를 들면 GDP 대비 주식시가총액이 39,1%에 불과하고(미국 108,0%, 영국 125,8%, 한국 100,1%), GDP대비 투자펀드 규모도 독일은 8,2%이다.(미국 77,0%, 영국 33,5%, 한국20,8%)

이는 미국이나 영국이 자본시장을 중심으로 잉여자금을 조달하는 것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따라서 독일의 경우는 은행시스템을 살펴보는 것으로 금융시스템의 전반을 이해하고 그 함의를 찾을 수 있다.

특수은행

, 독일 금융기관 중에는 특정분야에 전문화된 업무를 수행하는 특수은행이 있다. 이들은 모기지은행(Realkreditinstitute), 건축대부조합(Bausparkassen), 특수목적은행, 그리고 기타은행으로 구분되는데 대표적 정책금융기관이 KfW(Kreditanstalt für Wiederaufbau)이다.

KfW는 1948년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경제복구, 유럽부흥계획에 따른 자금관리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통일 후에는 동독 지역 주택 및 인프라 건설, 기업 지원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현재 중소기업 지원, 주택건설 및 현대화사업, 교육, 인프라 건설뿐만 아니라 연방정부를 대신하여 개발도상국 지원업무도 수행하는 등 시대에 따라 주요 역할이 변해왔다.

현재 지분구조는 연방정부 80%, 주정부 20%로 되어 있으며, 2002년 정책금융 재편방안에 따라 2008년 상업금융 기능을 자회사(KfW-IPEX)로 편제하였다.

독일 금융계의 특징

이렇게 독일 금융시스템이 지역 중심의 공립은행이나 협동조합은행으로 이루어진 것은 역사적 전통과 관련이 깊다. 독일은 오랜 세월 각 지역의 봉건영주의 통제 아래에서 그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을 해왔다. 물론 이웃 영주와의 교류도 있었지만 교류할 때는 세금이 부과되는 등 나름의 제약이 있었기에 금융거래는 자연히 지역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지역 금융을 담당하는 저축은행이나 단위조합은행이 각 지역에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역을 기반으로 한 금융은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각 기관의 경쟁이 제약되어 비효율성을 초래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독일 금융기관의 낮은 수익성은 이러한 금융시스템과 공익성을 강조하는 전반적인 분위기에 기인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독일통일 과정과 유럽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독일금융기관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으며 그 방향 또한 분명하다. 각 지역경제를 지탱하는 풀뿌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관계형 금융기관은 더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세계를 상대로 하는 금융거래나 투자는 각 저축은행이나 조합은행의 상위기구에서 전담하되 M&A 등을 통하여 대형화를 추구하고 있다. 게다가 은행중심(Bank-Based)의 금융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독일은 그로 인해 주식, 채권, 펀드 등의 자본시장 거래규모가 시장중심(Market-Based)의 미국, 영국, 일본 등 다른 선진국에 비해 훨씬 작다. 이것은 글로벌 금융위기와 유럽의 재정위기 가운데서도 독일 금융시장이 상대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보이는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 주립은행은 취약한 사업구조, 해외과잉투자 등으로 금융위기 때 부실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부실 확대로 2007년 두 개의 주립은행은 통합(Landesbank Baden-Württemberg가 SachsenLB 인수)되었으며 2008~2009년 BayernLB, WestLB, HSH Nordbank 등은 구제금융을 받았다. 유럽경제의 침체로 인하여 독일의 일부 대형 상업은행은 지금도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풀뿌리 금융기관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독일인들도 그들을 신뢰하여 어려움 중에서도 그 기반을 강화하였다.

독일내 외국계 은행

독일에 진출한 외국계 은행과 독일은행간 영업에 대한 차별은 거의 없다. 외국계 은행은 주로 EU국가 은행들(Santander, HSBC, SEB, ING 등)로 소매금융 업무를 위주로 하여 수신, 대출 등 현지 소매금융기관들과 동일한 형태의 업무를 수행한다. 투자은행 업무(UBS, JP Morgan, Barclays 등)로는 현지 시장에서의 증권업무와 투자은행관련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터키계와 중동계 및 동유럽권 은행은 현지 체류 자국민 대상 송금, 환전 등의 업무가 주요 업무이며 부수적으로 자국 기업에 대한 금융 지원업무를 수행한다. 일본, 중국계 은행은 현지 진출 자국 기업에 대한 금융지원과 무역금융 관련 업무 등을 주요 업무로 취급한다. 일본계 은행인 Mizuho의 경우, Frankfurt에 지점을 두고 독일 및 동구권시장 등에 대한 금융업무를 수행하며 일본계 기업이 많은 Duesseldorf에는 지점을 두고 현지 일본계 기업에 대한 지원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에 진출한 외국계 금융기관들의 영업에는 여러 형태의 애로가 있는데 독일 특유의 금융시스템에 기인한 것이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독일 금융체계는 대형 상업은행과 지자체, 주정부 등이 주주로 되어 있는 저축은행 및 주립은행, 협동조합은행 등 3柱체제가 촘촘히 자금조달과 공급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와 지자체 등에서 후원하고 지역조합이 발달한 독일에서 소수의 인력만으로 영업하는 외국계금융기관이 독일 금융시장을 파고드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유럽계 이외의 금융기관의 경우, 조달비용 열위, 대출 등 특정거래 중심의 제한된 상품취급 등으로 미주 및 서구 유럽계와 동등한 수준의 경쟁은 더욱 힘든 상황이다. 이로 인해 외국계 금융기관들은 다양한 금융상품을 판매하거나 독일계기업이나 주민을 상대하기 보다는 자국에서 현지에 진출한 기업이나 모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단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1353호 29면, 2024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