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이어 해외 보존·복원 지원사업 시작·
첫 대상은 미국 내 ‘평안감사향연도’
삼성문화재단이 국내에 이어 해외에 있는 한국 문화유산의 보존·복원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해외의 한국 문화유산 보존·복원 지원사업을 하고 있는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이어 삼성문화재단이 나서면서 해외에서의 한국 문화유산 보존·복원, 나아가 현지 활용이 한층 활성화될 전망이다.
해외 문화유산의 보존·복원은 현실적으로 국내 환수하기 힘든 문화유산을 현지에서 전시·연구하거나 다양하게 활용하기 위해 선행돼야 할 필수적인 조치다. 해외의 한국 문화유산은 모두 22만9600여점(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23년 10월 말 기준)으로 27개국에 흩어져 있다. 이들 중에는 훼손에 따른 보존처리나 복원이 이뤄지지 못해 공개 전시나 각종 활용을 하기 힘든 것도 상당수이다.
삼성문화재단은 “재단이 운영 중인 리움미술관 보존연구실을 중심으로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협력해 보존처리가 절실한 해외 소재 한국 문화유산의 보존·복원처리 지원사업을 시작한다”고 2023년 11월 29일 밝혔다. 국내 사립미술관이 보유한 보존·복원 능력으로 해외 소재 문화유산의 보존·복원을 지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삼성문화재단은 “이 지원사업은 지난해 9월 국외소재문화재재단과 국외 소재 문화유산 보존·복원 및 활용과 관련한 제반 사업을 종합적·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업무협약에 따른 것”이라며 “앞으로 해외 한국 문화유산의 보존·복원처리를 위한 인력과 기술 등 모든 면에서 아낌없이 지원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삼성문화재단의 첫 지원 대상은 미국 피보디에식스박물관이 소장 중인 조선 후기의 명품 ‘평안감사향연도(平安監司饗宴圖)’다. ‘평안감사향연도’는 19세기 전반 작품으로 평안도에서 열린 도과(道科·조선시대 각 도에서 실시한 특수 과거시험) 급제자들을 위해 평안감사가 베푼 성대한 잔치 모습을 비단에 그린 8폭 병풍이다. 각 폭 크기는 128.1×58.0㎝이다. 원래 병풍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각각 떨어져 8장의 낱장으로 분리된 상태다.
폭마다 평양의 대동강과 선화당, 연광정, 부벽루 등 역사적 공간에서 펼쳐진 연회 장면과 급제자들의 행렬, 뱃놀이 등을 독립된 주제로 삼아 구체적·사실적으로 그려진 채색 기록화이기도 하다. 화면 곳곳에 금박 안료가 사용되기도 했다. ‘평안감사향연도’는 수준 높은 화면 구성이나 필치, 뛰어난 채색 기법, 시대상이나 풍속의 정교한 표현, 고급 안료 사용 등으로 볼 때 전문화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전반적인 노화와 벌레먹음 피해 등으로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다. 특히 부벽루에서의 연회 장면은 그림의 3분의 1 정도가 없어진 실정이다. 또 채색된 바탕 비단이 노화로 인해 유연성이 떨어져 화면 전면에 걸쳐 꺾이거나 갈라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리움미술관 보존연구실은 앞으로 16개월에 걸쳐 ‘평안감사향연도’의 보존처리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그림 뒤의 산화된 배접지를 제거하고, 벌레먹음이나 다른 손상 요인으로 없어진 부분을 그림의 재질과 동일한 종이와 바탕 비단을 재현·제작해 색을 맞춘 뒤 메워줄 계획이다.
또 동시대의 유사 작품들을 조사·분석해 낱장의 현 작품을 조선시대 병풍 형태로 복원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림의 내용은 다르지만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평안감사향연도’가 소장돼 있기도 하다.
삼성문화재단은 ‘평안감사향연도’의 보존처리를 2025년 3월 중으로 완료할 계획이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리움미술관에서 전시 및 심포지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어 그동안 감상하기 힘들었던 ‘평안감사향연도’를 많은 시민이 함께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예정이다.
류문형 삼성문화재단 대표이사는 “국내 문화유산인 안중근 의사 유물의 보존처리 지원에 이어 이번에는 ‘평안감사향연도’의 보존처리에 나선다”며 “앞으로 작품 상태가 온전치 않아 전시되지 못하고 있는 해외의 많은 한국 문화유산을 리움미술관의 축적된 보존처리 기술로 되살려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피보디에식스박물관은 ‘평안감사향연도’의 보존처리가 완료된 직후인 2025년 5월 한국실을 개관하고 ‘평안감사향연도’를 주요 작품으로 전시할 예정이다. 린다 로스코 하티건 관장은 “이 보존처리 프로젝트는 한국실 개관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전문가의 손에서 재탄생한 아름다운 작품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삼성문화재단의 해외 한국문화유산 보존처리 지원과 관련, 김정희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은 “앞으로 국외에 있는 우리 문화유산들이 온전히 제 모습을 유지하면서 그 가치를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2013년부터 해외의 한국 문화유산 보존·복원과 활용 지원사업을 펼치고 있다.
삼성문화재단은 지난 9월 한국국제교류재단과 함께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한국 미술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큐레이터직 신설을 지원했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은 지난 1998년부터 한국국제교류재단 지원금과 삼성문화재단의 이건희 한국미술기금 지원으로 한국관을 운영 중이다.
또한 지난 2월에는 1년 여에 걸친 안중근 의사의 ‘가족사진첩’과 유묵 2점의 보존처리를 완료하고 공개 전시를 마련하기도 했다. ‘가족사진첩’은 안 의사가 순국때까지 가슴에 품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부인 김아려 여사와 두 아들 분도·준생의 사진첩이다. 유묵은 ‘지사인인 살신성인(志士仁人 殺身成仁)’과 ‘천당지복 영원지락(天堂之福 永遠之樂)’이다. 특히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기도 한 ‘지사인인 살신성인’은 안 의사가 중국 뤼순감옥에 투옥 중이던 1910년 3월에 쓴 글씨다. 유묵의 내용은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이는 스스로를 희생해서라도 인을 이룬다’는 의미다.
1363호 30면, 2024년 5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