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목
친구야!
먼저 『서독 광부 박세윤의 내 삶』 출간을 축하하네. 그래도 동갑내기 친구라 먼저 출판물을 선물해 줘서 감사했다네.
자네는 서툰 글솜씨라 겸손했지만, 꾸밈없고 진솔하며 소박한 내용들이 공감이 되고 동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공감이 되고 정감이 가더구나.
먼 미래인 줄 알았던 팔순이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지금, 이제야 되돌아보니 우리들의 한 평생이 꿈결같이 구름처럼 흘렀고, 즐거움보다는 고통과 눈물, 고난의 시간들이 쌓여 현재의 ‘너와 나’라는 존재가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보네.
우리가 태어나기 직전 해방이 되었고, 이듬해는 정부 수립, 3살 때는 6.25라는 불행의 세월 속에서 너와 나 모두가 하루하루가 힘들고 험난한 시절이었지.
성주에서 농군의 장남으로 태어나 유년을 보내던 시절, 가뭄이나 장마, 거기다가 행여 홍수라도 휩쓸고 나면,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고 허기진 배고픔을 달래야 하는 고난의 세월이었지.
그 시대의 부모님들은 금술은 얼마나 좋으시던지 형제자매들이 많은 가정들이 대부분이었지. 그해 흉작이라도 하면, 그 많은 식구의 생계를 걱정하시는 부모님 그 삶의 무게에 얼마나 짓눌리셨을까?.
청소년 시절 부모님 곁을 떠나 타향살이를 할 때의 외로움, 서러움, 그 시절의 세월도 결코 그리 만만치 않았을 거라고 짐작이 가네.

자네는 1968년, 나는 1967년에 군 입대를 했었네. 자네는 아마 하사관, 나는 그냥 사병으로 복무해 졸병 때는 밤마다 내무반에서 고참들에게 엉덩이 피 터지게 빳다를 맞았고, 그 지겨운 불침번, 보초, 사역, 유격훈련 등 몸서리치는 군생활, 그것도 입대할 때는 의무 복무 기간이 30개월이었는데 엊그제 돌아가신 김신조 무장공비, 그 양반이 내려오시는 바람에 6개월 연장근무를 해 분하기가 짝이 없었다네.
하지만 선천적으로 약골이었던 내가 인내심과 강인함, 그리고 긍정적 사고를 가질 수 있게 되어 오히려 그때 힘겨웠던 군 생활에 감사를 했다네.
친구 역시 그때의 고된 군 생활이 훗날 모진 세월을 견디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생각은 아마 나와 동일할 것이라고 여겨지네.
1974년 독일행, 인생의 대전환점 낯선 이국땅에서 기껏 몇 주간 교육을 받은 후 지하갱도의 뜨거운 열기를 견디며, 매 순간 죽음의 공포와 육체의 고통을 3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한 번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고향의 부모님과 동생들이 떠올라, 기어코 가난의 설움을 극복하자 하는 모진 결단이 있었음일 테지.
1977년 서른 나이에 인생의 소중한 반려자를 만나 시행착오의 반복, 실패, 성공의 긴 여정을 함께한 나날들, 무겁고 고단하고, 절망과 좌절에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순간순간의 시간들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행복이 말없이 곁에 다가와 있다고 말하는구나.
조용히 찾아온 행복, 두 아이들이 어느새 장성에서 건실한 가정을 이루어 토끼 같은 손주들이 재잘거림을 듣는 기쁨. 이 모든 것들이 오랜 세월을 굳세게 견뎌온 인내의 열매가 아닌가 싶네.
친구야!
다음 주는 파스카 축제일이구나. 이집트 종살이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도달하기까지 4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얼마나 고된 고난과 고통의 나날이었을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결코 그 고통을 머무르게 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들로부터 다 지나가게 하셨다네.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서야 제가 오늘 내 친구 박세윤 에드몬드가 이 서독 광부의 삶을 집필해야 하는 그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은 결코 머무르지 않고 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오늘 친구에 입가에서 번져가는 미소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조용한 외침을 들었습니다. “나 참 잘 살았다. 나 참 잘 살았다.” 너무 잘 살아왔던 그 탄성이 내 귓가에 맴돌았습니다.
찬구야!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인생의 끝자락에 섰을 적에 “나 참 잘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하더구나. 지나간 모든 것이 어렵고 힘들었던 순간순간들이 지금은 모든 것이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구나.
이제 남은 여생은 우리 주님의 은총 속에서 건강하고 편안하고 지혜롭게 행복한 삶을 함께 살아 보세나.
1407호 17면, 2025년 4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