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광복군 창립 80주년

9월 17일은 광복군 창립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 항저우, 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쓰촨성 충칭에 마지막 둥지를 틀었을 때는 중일전쟁이 한창이었다. 연합군 참전과 독자적 대일전쟁 수행을 위한 광복군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국땅에서의 군 창설은 만만치 않았다. 중국 정부는 자국의 군사위원회가 광복군을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시정부는 당연히 독자적인 군 창설을 고집했다. 중국이 양보하지 않자 김구 주석은 장제스의 승인 없이 1940년 9월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창립대회를 거행했다.

김구는 <백범일지>에 당시 상황을 전했다. “나는 임시정부에서 이청천(지청천)을 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하와이 동포들로부터 원조받은 3만~4만원 등 가진 역량을 다하여 중국과 서양 인사를 초청하고 우리 한인을 총동원하여 충칭 가릉빈관에서 광복군 창립식을 거행했다.”

연원 및 발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하에,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를 제정하여,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하였다.

이와 함께 임시정부는 1919년 말 상하이(上海)에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자체적으로 군사 간부를 양성하는 한편,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관할하에 두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지역적 차이·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

그 뒤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자, 김구는 1934년에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여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도 우리나라 청년들을 입교시켜 군사 인재의 양성에 힘썼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면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成立典禮)는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거행되었으며, 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 처장에 최용덕, 참모 처장에 채원개, 부관 처장에 황학수, 경리 처장 겸 정훈처장에 안훈, 훈련 처장에 송호(, 군무 처장에 유진동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그리고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다. 제1 지대장에 이준식, 제2 지대장에 김학규 제3 지대장에 공진원 제5 지대장에 나월환이 임명되었다.

한편,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하여 파괴 공작을 진행시킨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태평양 방면에서의 한국인 포로 재훈련과 파견사령부설치, 비행대 편성 등에 관한 작전 계획도 수립해 놓고 있었다.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OSS)과 협약을 맺고 특무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1944년 ‘조선인학도육군지원병제도’와 ‘징병제도’가 실시되면서, 4,385명의 한국 청년이 강제로 일본군에 편입되어 남양(南洋)과 중국 전선에 배치되기 시작되었고, 이들 중 일부가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넘어왔다.

그 중에서도 안휘성 푸양에 있던 광복군 징모 제6분처에는 장준하·김준엽 등 일본군을 탈출한 학병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이들 중 50명의 탈출 학병들은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1945년 1월 말 가슴에 태극기를 붙이고 애국가를 부르며 충칭에 도착하였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소속 100여명도 합류했다. 30명으로 출범한 광복군은 5년이 지나자 병력 1000명에 가까운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용기백배한 임시정부는 일제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에 맞서 대일전쟁을 선포했다. 중일전쟁의 격전지인 인도·버마 전선에는 병력을 파병했다.

이를 계기로 광복군과 미국 OSS사이에 특수 훈련 문제가 협의되었고, OSS에서는 싸전트(Clyde, B.Sargent) 대위와 윔쓰(Clarence, N.Weems) 대위를 각각 파견하여 광복군 제2지대와 제3지대를 중심으로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하였다. 그 뒤 1945년 8월 4일 3개월 과정의 훈련을 마친 제1기생들이 배출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미국의 OSS 책임자와 한·미간의 공동 작전을 협의하고,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내용은 시안과 푸양에서 OSS 훈련을 받은 광복군에게 각종 비밀 무기를 주어, 산뚱(山東)에서 미국 잠수함을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이들로 하여금 국내의 요소를 파괴하거나 혹은 점령하게 한 후에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국내진공작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기 직전에 취소되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김구는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이다”라고 일본의 항복을 개탄하고 있다.

해방 후 쓸쓸한 귀국

해방 후 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인 자격으로 귀국하길 원했다. 그러나 미 군정은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으로 저지했다. 때문에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 할 수밖에 없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지청천 총사령관은 광복군 요원들의 귀국이 마무리되자 1946년 5월16일 중국 땅에서 쓸쓸히 군대 해체를 선언했다. 귀국한 광복군의 일부는 대한민국 국군에 참여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명실상부한 군대였다. 현대식 군편제를 갖추고 전투경험도 쌓았다. 그러나 정작 광복이 됐을 때 광복군은 조국 땅을 밟지 못했다. 전통이 대한민국 군대로 제대로 이어지지도 못했다. 국군의 날을 휴전선 돌파일(10월1일)이 아닌 광복군 창립일(9월17일)로 해야 한다는 요구도 묵살됐다. 허허로운 광복군 80주년이다.

사진: 1940년 9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후 한중 대표 기념촬영

1187호 25면, 2020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