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백남준, 그에게는 여러 가지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뒤상보다 더 뛰어난 20세기 최대의 예술가’, ‘징기스칸의 후예임을 자처한 동양에서 온 천재’, ‘TV에 생명을 불어넣고 장난감처럼 다룬 현대예술의 대가’ 등 그에 대한 많은 일화와 함께 현대 미술, 특히 20세기 후반부의 현대미술에서 백남준의 위상은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겠다.
문화사업단에서는 백남준의 생애와 작품, 현대 미술에서의 그의 위치에 대한 심층적으로 다루어 본다.
백남준의 생애
백남준은 시대를 50년쯤 앞서 살아간 인물이다. 지금 현대미술에서 당연시하는 ‘과학과 미술의 만남’을 그는 반세기 전에 시작했다. “주변의 모든 물건과 경험이 예술로 태어날 수 있다”는 새로운 장을, 그때 열었다. 유럽인과 미국인들에게는 생소하고 작은 나라에서 온 작가였지만, 그가 전시를 할 때마다 세계 미술계는 술렁거렸다. 데뷰 때부터 현대 미술의 여러 흐름들을 이끈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ㆍ인종ㆍ종교ㆍ문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소통의 가능성을 탐구한 사상가이기도 했다. 지난 2006년 74세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삶과 예술을 통해 보여준 열린 사고와 소통, 공유의 정신은 21세기를 주도하는 ‘힘’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남준은 일제강점기인 1932년 7월20일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음악에 심취했다. 한국전쟁 뒤 일본 동경대학 문학부에 입학하면서 철학과 미학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동경대에서 유럽 철학과 현대 음악을 배웠고 쇤베르크의 음악에 대해 졸업 논문을 썼다.
이후 독일 뮌헨대학으로 건너가 음악과 미술공부를 하면서 당시 전위예술을 주도하던 ‘플럭서스(Fluxus)’ 그룹에 합류한다. 플럭서스는 1960~1970년대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난 국제 전위예술 운동이다. 이곳에서 그는 존 케이지, 카를 하인츠, 슈토크 하우젠 등 당시 전위예술 분야에서 명성을 날리던 예술가들을 만나게 된다. 그의 가슴 한편에 불타던 예술혼을 일깨운 것도 이 무렵이다.
1958년 독일에서 존 케이지와의 우연한 만남은 선불교, 신음악에 대한 관심을 전위 미술로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60년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발표할 당시 그는 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가 넥타이를 자르는 등 관객에 대한 행위를 무대 밖으로까지 넓히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1963년 독일 북부 도시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잘라진 소머리와 함께 텔레비전 13대를 사용한 비디오 예술을 선보이며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1969년 미국에서 샬롯데 무어맨과 공연을 하면서 비디오 아트를 예술 장르로 편입시킨 선구자라는 평을 얻었다.
백남준은, 하지만 끓어오르는 자신의 실험정신과 예술혼을 더 큰 세계에서 펼쳐 보이고 싶었다. 1965년 미국으로 건너가 ‘사이버네틱 미술과 음악’의 개인전을 열고, 본격적인 미국 활동에 들어간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후 뉴욕에서 자신의 전문 아티스트가 된 슈아 아베를 만난다. 또 자신의 평생 반려자인 비디오 작가 ‘시게코 구보다’와 1977년 결혼한다.
일본인 아내 구보타 시게코와의 러브스토리도 유명하다.
연인으로, 아내로, 예술적 동반자로 백남준과 40여년을 함께 한 그녀는 회고록을 통해 “남준은 비상한 기억력을 가졌지만 소지품을 못 챙기는 면에서는 어린아이보다 심했다. 그래서 항상 뭔가를 잃어버리고 다녔다. 단 것을 무척 좋아해 케이크, 과자 등을 즐겼으며 커피는 반이 설탕이었다”고 썼다.
그녀는 “그의 안에는 소름 돋는 천재 예술가와 순진무구한 어린아이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런 그의 옆에서 때론 속을 썩기도, 때론 거대한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의 뉴욕 작품 활동은 순탄했다.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개최한 ‘백남준 회고전’은 비디오 아티스트로서의 위상을 재확인시켜 준 계기가 됐다.
그는 과학의 힘을 예찬한 예술가였다. 1984년에는 조지 오웰의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위성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과학이 세상을 얼마나 밝고 아름답게 만들 것인지를 증언하고자 했다. 그 작품은 인공위성으로 서울-뉴욕-파리를 동시 연결하는 거대한 TV쇼였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에서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미래사회를 어둡게 그렸지만, 백남준은 이를 거부하며 “발달된 과학기술이 전 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묶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작품으로 웅변했다.
그의 이 같은 화려한 예술 활동은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 수상과 세계 100대 작가 중 8위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이후 백남준은 2000년 우리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으며 국내 예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96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몸 왼쪽 부분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의 예술혼은 한 번도 식을 줄을 몰랐다. 불과 15개월 전인 2004년 10월에도 그는 뉴욕 소호에 있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피아노에 물감을 칠한 뒤 힘껏 밀어버리는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 바침’을 했다.
백남준에게는 삶 자체가 예술의 질료였다. 그는 모든 소재를 늘 참신한 예술의 형태로 만들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재활하는 과정을 담은 비디오 ‘성적 치료(Sexual Healing)’를 2003년에 뉴욕 맨해튼에서 선보였을 때 그는 “인생 자체가 예술”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열여덟 살에 고국을 떠났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사용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고국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의 비디오 속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이미지에 김소월의 시구가 섞여 있고, 퀴리 부인과 정약용, 허준이 함께 들어가 있다. 그렇게 56년이 흘렀다.
하지만 세기의 예술가도 ‘인생유한’의 단순한 진리를 비켜가지는 못했다. 그는 지난 2006년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74세를 일기로 뉴욕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1206호 23면, 2021년 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