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11)

로르쉬의 수도원(Kloster Lorsch)


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매주 연재한다.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아픈 역사도 갖고 있는데, 2009년 현대적 교량 건설로 인해 자연 경관이 훼손됨을 이유로 드레스덴 엘베 계곡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명된 것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제명된 첫번째 사례였다.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등재일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로르쉬 수도원은 헤센 주 문화유산 가운데 처음으로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에 부흥했던 로르쉬 수도원에는 기념비적인 입구인 토어할레(Torhalle)가 있으며, 구 성당의(Alten Münster)의 희귀한 건축 유적이 남아 있다. 이곳에는 카롤링거 왕조 시기의 조소 작품과 회화가 상당히 잘 보존되어 있다.

유네스코위원회는 로르쉬 수동원의 세계문화유산 등재기준으로 먼저, 1,200년의 역사를 지닌 독특한 Torhalle의 훌륭한 상태로 남아 있고, 현존하는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매우 희귀한 건축물임을 소개하였다.

로르쉬 수도원으로 대표되는 이 종교 단지에는 1200년 된 독특한 누문(樓門, Torhalle)이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다. 또한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희귀한 건축물로 구성된 수도원에는 당시 조소 작품과 회화가 잘 보존되어 있다. 카롤링거 왕조 시대의 이 누문은 칼 대제(Karl der Große) 치하의 수준 높은 중세 정신에 대해 건축학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이제 로르쉬 수도원을 살펴보도록 하자.

보름스(Worms)와 다름슈타트(Darmstadt)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인 로르쉬 수도원은 피핀 시대에 프랑크의 가우백작 칸코어(Gaugraf Cancor)가 그의 모친 빌리스빈다(Williswinda)와 함께 764년 건축을 시작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로르쉬 수도원의 첫 번째 원장은 메츠(Metz)의 주교인 크로데강(Chrodegang, 766년 사망)이었다. 764년 이전에 크로데강 주교는 괴르츠(Goertz)에서 수도사들을 데려와 로르쉬에 거주하게 하였고, 로마에서 획득한 성 나자리우스(St. Nazarius)의 유물을 765년에 이 수도원에 기부하였다.

로르쉬 수도원은 772년부터 황제의 보호를 받았으며, 774년 마인츠 대주교는 칼 대제가 참석한 자리에서 이 수도원을 성 베드로, 성 바울, 성 나자리우스에게 봉헌하였다.

로르슈 수도원의 연대기(Codex Laureshamensis)에 따르면, 778년~837년에 로르슈 수도원장 가운데 아주 중요한 세 인물인 헬메리히(Helmerich), 리히보트(Richbod), 아델로크(Adelog)가 이루어놓은 개선 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카롤링거 왕조의 독일 왕 루드비히 2세가 사망(876년)하자 이곳이 독일 카롤링거 왕조의 묘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로르쉬 수도원의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루트비히 3세(876〜882)는 아버지 유해를 안치하기 위해 이곳에 지하 납골당을 건축하였고, 이후 자신은 물론 아들인 휴고와 콘라트 1세(독일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인 루트비히 4세의 사망으로 독일의 선제후가 된 프랑코니아 공작의 배우자 퀘네공드(Cunegonde)도 이곳에 묻혔다.

황제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된 로르쉬 수도원은 이후 급속히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로르쉬 수도원은 1090년 화재로 전소되었으며, 12세기에 들어서야 재건되었다. 13세기에 들어 로르쉬가 마인츠 선제후 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 황제의 선거권이 있던 7명의 제후)의 영토에 통합되면서(1232), 기존에 누리던 특권 중 대부분을 잃었고 역사의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로르쉬 수도원은 처음에는 베네딕트 수도회를 따르다가, 이후 보다 청빈과 검소, 또 기도와 노동을 중요히 여겼던 베네딕토회 원시회칙파의 일파인 시토회(Ordo Cisterciensis) 종파를 따랐고, 훗날에는 프레몽트레 수도회(Ordo Praemonstratensis)를 따랐다.

로르쉬 수도원은 이후 정치와 전쟁에 따른 예측불허의 변화를 겪으면서 서서히 쇠퇴하였다. 로르쉬는 1461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령에 복속되었고, 1803년 헤센 백작령의 영토로 통합되었다. 30년전쟁 기간이던 1620년~1621년에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약탈 및 파괴의 아픔도 겪었다.

로르쉬 수도원의 중요성은 그 역할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카롤링거 왕조에서 개발된 교육 프로그램의 보급을 위한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 중 하나였는데, 로르쉬 수도원은 중세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도서관 중 하나로 유명하다. 소장 서적가운데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작품들은 전 세계 73개 도서관에 흩어져 보관되고 있다.

또한 이 수도원은 또한 의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개척자였다. 8세기 말의 Lorsch Pharmacopoeia는 고대 후기 시대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의학-약전 사본이기도 하다.

종교개혁시대 이후 유럽에서 수도원 생활양식이 급감함에 따라 로르쉬 수도원 역시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이후 폐허에 가까운 모습만이 남게 되었다. 둥그런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옛 수도원 터에는 누문(Torhalle), 12세기 복구 당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의 일부분, 수도원의 유적들, 그리고 마인츠 대주교의 지시 하에 지어졌던 몇 가지 소건축물 등이 잔재해 있다.

그러나 로르쉬의 수도원과 성당 유적은 로마네스크 양식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기 이전에 지어진 독일 건축물 중 현재까지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문화재 중 하나로 큰 의미가 있다.

오늘날에도 유럽 ​​전역의 순례자들은 로르쉬 수도원에 도착하여 거의 원래 상태로 보존되어있는 Torhalle를 방문하며 그들의 신앙을 더욱 공고하게 하고 있다.

1259호 31면, 2022년 3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