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명의 기원 그리스신화 (4)
유럽 문화를 관통하고 있는 두 가지 줄기 헬레니즘과 유대이즘, 즉 고대 그리스 신화는 성경과 함께 서양의 문화를 읽어내는 코드이자 일반인들에게 서양문화의 모태를 설명해 주고 있는 교과서라 할 수가 있다.
이렇듯 서양문화의 원류인 그리스 신화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상상의 세계로, 시공을 초월하는 삶의 보편적 진리와 인간의 희로애락을 촘촘하게 엮어나간 대서사시이다. 이는 유럽인의 정신적 바탕을 이루는 서양 문화의 원천으로 문학과 미술, 연극 등 수많은 예술작품의 창작 소재로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도 그리스 신화의 이해는 유럽 역사와 문화 이해에의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사업단은 ‘유럽문명의 기원 그리스신화’ 를 통해 그리스신화의 탄생 배경, 올림푸스 12신의 등장, 그리고 서양문화 속에 스며든 그리스신화의 그림자를 살펴보도록 한다.
그리스 신화와 유럽 문화
그리스 신화는 수 세기 동안 문학에서부터 미술, 음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서양 문화와 언어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에도 그리스 신화는 문학과 미술, 건축 등 일반 예술뿐만 아니라 영화, 소설, 게임 등 여러 분야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렇듯 그리스 신화는 인간 내면의 심리를 깊게 파고들면서도 매혹적인 판타지가 어우러져 있다는 점에서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삶과 함께 해왔다.
서로마제국의 몰락 후 유럽의 1000년 중세 동안 깊은 잠에 빠져있던 그리스신화는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 고대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다시금 세상에 나오게 된다. 르네상스 초기부터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주제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에 대한 주제를 묘사하기 시작하는데, 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주제는 이탈리아 예술가인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의 《갈라테아》등이 있다. 또한, 라틴어 고전과 오비디우스의 시를 통해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 보카치노, 단테 등과 같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시인들도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특히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은 죄악시하던 인간의 육체를 온전한 나체로 표현하였는데, 이러한 과감한 시도는 중세의 예술을 르네상스로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북유럽에서 그리스 신화는 아탈리아와는 달리 건축과 미술 같은 시각 예술의 주제로는 쓰이지 않았으나, 문학 분야에서는 큰 영향을 주게 되는데, 라틴어와 그리스 고전 원문을 번역하면서 신화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존 밀턴이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셰익스피어와 로버트 브릿지스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요 영국 시들도 그리스 신화에서 그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프랑스의 장 라신과 독일의 괴테는 그리스 희곡을 부활시켰는데, 특히 라신은 파이드라, 안드로마케, 오이디푸스와 이피게네이아처럼 많은 고대 신화들을 새로운 목적으로 개작하였다.
18세기에는 계몽주의의 철학이 유럽에 퍼지면서 그리스 신화에 대한 반발 작용으로 신화보다는 그리스와 로마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업적을 강조하는 풍조가 강해지게 된다. 그러나 신화는 작가에게는 가공되지 않은 소재의 중요한 출처로 계속해서 쓰였으며, 이를 통해 헨델의 오페라 《아드메토》, 《세멜레》,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 글루크의 《아울리데의 이피게네이아》의 리브레토가 만들어졌다.
18세기 말에는 낭만주의가 대두되면서 신화를 포함한 그리스의 모든 것에 열중하기 시작하는데, 영국에서는 이 때 그리스 비극과 호메로스에 대한 새로운 번역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며 키츠, 바이런, 셸리와 같은 당대의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장 아누이, 장 콕토, 장 지로두, 미국의 유진 오닐, 영국의 T. S. 엘 리엇 등의 주요 극작가와 아일랜드인 제임스 조이스, 프랑스인 앙드레 지드 등의 주요 소설가가 고전 신화 속 주제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을 썼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자크 오펜바흐를 비롯한 여러 음악가가 그리스 신화를 음악의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예술부분뿐만 아니라 철학에도 그리스신화는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니체와 프로이트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중 오이디푸스 신화를 차용해온다. 니체에게 있어 디오니소스는 니체 철학 그 자체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디오니소스는 죽었다가 회생하는 영원회귀의 인물 즉 니체 철학의 정수인 위버멘쉬(Uebermensch)이다.
이렇듯 니체와 프로이드는 그리스 신화를 차용하여 근대적 세계를 무너뜨리고 탈근대적(post modern) 세 계를 이끌어내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합리적-도구적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근대인의 혼란과 고통, 자본주의적 실존의 괴로움을 털어내기 위해 이 둘은 모두 신화의 힘을 빌려온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화는 합리적으로 제어되지 않는 비이성적인 힘을 의미한다. 이성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닥치게 되자, 이성의 시대가 다시 비이성을 불러세운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올림포스의 신들을 믿는 현대인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문학으로 미술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고 그들의 지위는 계속 유지될 것이다.
그리스 신화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문학이나 미술 등 각 분야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이야기가 단순히 재미있다는 이유에서 만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인간 심리의 비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화의 가치는 인간 생존의 가장 중요한 문제들 – 전쟁과 평화, 삶과 죽음, 선과 악 등 – 에 필요한 지식의 끊임없는 원천이 된다는 것에 있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신화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는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서구의 문화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 할 수 있다.
1262호 23면, 2022년 4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