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35)

독일 최고(最古)의 도시 트리어(Trier)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트리어: 독일 기독교의 시작

트리어는 종교(기독교)적인 면에서도 트리어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예수의 수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베드로는 Euchaius, Valerius, Maternus를 알프스 이북 지역의 선교를 위해 파견하고,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트리어이고, 이곳에 기독교 공동체를 건설하게 된다. 이후 베드로는 Euchaius를 트리어의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고, 이어 Valerius와 Maternus가 그 뒤를 이어 주교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렇듯 트리어는 유럽의 기독교 전파가 시작된 도시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

트리어대성당(정식명칭 Hohe Domkirche St. Peter zu Trier)은 독일지역을 너머 유럽 전체에서도 최초의 로마네스코 양식의 교회건축물이다. 그러나 오래된 건축 연대나 교회의 대단한 규모(애초에는 현재의 4배 규모로 지어졌다)로서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공인하였고, 그동안의 박해시기를 벗어나, 최초로 건축된 대규모 교회였다는 점으로 유럽에서 트리어대성당은 교회사의 한 획을 그었던 것이다.

그러면 콘스탄티누스황제는 왜 기독교를 공인하게 되었고, 이곳 트리어에 대규모 교회건축물을 짓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그와 그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 (St. Helena)와의 슬픈 인생사가 숨겨져 있다.

성 암브로시우스(St. Ambrosius)의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여관 주인의 딸이었다. 그녀는 270년경에 후에 황제가 된 로마의 장군 콘스탄티우스 1세(Constantius I)를 만나 현격한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였다. 그들은 280년경 나이수스(Naissus)에서 외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이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1세는 289년에 정치적인 이유로 성녀 헬레나와 이혼하고, 그리스도교 박해자 중 한 명인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의붓딸인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하여 292년에 황제 휘하의 카이사르(Caesar)가 되었다. 남편에게 버림받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던 성녀 헬레나는 당시 박해를 받고 있던 그리스도교에 귀의하게 된다.

한편 그녀의 외아들 콘스탄티누스는 어머니를 떠나 아버지를 따라 전장을 누비면서도 늘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였다.

306년 콘스탄티우스 1세가 오늘날 영국의 요크(York)에서 죽자 군대는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를 황제로 선출한다. 황제에 오른 콘스탄티누스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즉시 어머니를 황궁이 있는 트리어로 모셔온 것이며, 그녀를 ‘아우구스타’(Augusta), 즉 황후라 부르도록 하고 그녀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을 주조하였다.

어머니 헬레나의 끊임없는 기도와 신앙의 힘이었던가, 312년 10월 12일 그 유명한 ‘밀비오(Milvio) 다리 전투’에서 숙적 막센티우스를 격파하고 승리하고 마침내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로 입성하여 로마의 1인자가 되었다.

‘밀비오 다리 전투’의 일화는 다음과 같다.

전투를 치르기 전 어느 날 밤, 콘스탄타누스 황제가 막사에서 꿈을 꾸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가 나타나더니 “이 표시로 너는 승리할 것이다(In hoc signo vinces)”라는 글자를 보게 된다. 꿈에서 깬 황제는 이 꿈에서 본 십자가 모양의 군기를 만들어 앞장세워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 전승이 기록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전(De Vita Constantini)>을 쓴 에우세비우스는 황제 본인으로부터 이 이야기가 진실이라는 맹세까지 받았다고 증언했다.

이후 헬레나는 그리스도교가 널리 전파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고, 그녀의 노력에 힘입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13년 ‘밀라노(Milano) 칙령’을 반포하게 되었다. 이로서 로마제국 내에서 그리스도교는 종교로 공인되었고, 투옥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석방되었으며, 빼앗긴 교회 재산을 돌려받게 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트리어에서의 교회 건축으로도 나타난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 320년 경 트리어의 황실 건물(황후 헬레나의 궁전이라는 설도 있음)을 철거하고 그 위에 거대한 교회를 건축할 것을 명령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최대의 규모로 지어진 트리어 대성당은 베드로 성인에게 봉헌되었지만, 실제적으로는 황후 헬레나에게 봉헌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를 통해 그의 어머니가 살아온 굴곡지고 고난과 슬픔으로 가득했던 세월을 보상하려 했던 것이었다.

헬레네는 326년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티나로 성지 순례를 떠났고, 이 성지순례에서 성의(예수가 처형될 당시 입었던 옷)과 예수의 처형에 쓰였던 못을 발견하게 되었고, 트리어로 돌아와 트리어 대성당에 봉헌하였다.

1512년 막시밀리안 신성로마황제가 이곳의 대주교에게 성의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고, 이후부터 트리어 대성당은 성지 순례지가 되었다. 1974년 이래 성의는 1891년에 제작된 목제함에 펼쳐진 채 온도 조절용 유리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7년 죽기 바로 직전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당시 기독교인들의 전례를 따른 것으로 죽기 직전까지 세례를 받는 것을 미루어서 현세의 죄를 온전히 씻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신은 비잔티움으로 옮겨져서 매장되었다.

다음 호에서는 트리어 대성당과, 성모교회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1263호 21면, 2022년 4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