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19)

고전주의 바이마르(Klassisches Weimar)

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매주 연재한다.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아픈 역사도 갖고 있는데, 2009년 현대적 교량 건설로 인해 자연 경관이 훼손됨을 이유로 드레스덴 엘베 계곡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명된 것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제명된 첫번째 사례였다.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등재일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유네스코는 세계 최초의 민주헌법이라 일컫는 ‘바이마르 헌법’이 제정·공표(1919)된 이 도시를 1998년 ‘고전도시 바이마르(Classical Weimar)’란 이름으로 세계유산 리스트에 올렸다. EU(유럽연합)는 괴테와 실러, 니체, 헤르더 등 출중한 인물들이 활동한 독일 문화의 중심지이자 고전문학의 메카라는 이유로 괴테 탄생 250주년이던 1999년 바이마르를 ‘유럽문화도시’로 선정했다.

1714년 작센-아이제나흐 공국과 작센-바이마르 공국이 동군연합이 되었다. 쇠퇴 이후 그저그런 시절을 보내던 바이마르가 독일의 문화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 시기는 바로 18세기 계몽주의 시기였다.

이 당시 바이마르 공국의 공비였던 안나 아말리아(Herzogin Anna Amalia)와 그녀의 아들 카를 아우구스트(Karl August) 공은 문화, 예술에 지대한 관심을 쏟고 있었고 많은 투자를 했다. 이는 엄청난 결실을 맺게 된다. 독일 주요 작가와 사상가가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바이마르에 모여들었고, 바이마르는 독일 고전주의의 중심지로서 번영을 누렸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프리드리히 실러, 프란츠 리스트, 헨리 반 데 벨, 발터 그로피우스 등 다수의 화가·작가·시인·음악가·철학자들이 이 도시에서 거주하였고 이로써 이곳은 오랜 기간 문화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그러나 그 중심은 독일 최대의 문호 괴테였다. 괴테는 바이마르 출신은 아니지만, 50년 이상을 이곳에 살며 인문과 문화와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도시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존재는 또 다른 예술가와 학자들을 불러들였으며, 이곳은 고대 아테네를 연상시키는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하여 ‘바이마르 고전주의’라는 말까지 생겨났다.

바이마르 온 도시 가득한 고전의 물결: 애송이의 위대한 만남

주민이 60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도시 바이마르, 그런데 누구보다도 포부가 컸던 26살의 청년 괴테가 1775년 이런 바이마르를 찾았다. 바이마르 공국의 최고지도자 카를 아우구스트) 공(公)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당시 바이마르가 처한 상황이나 그곳으로 가는 교통사정 등을 감안할 때 이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아우구스트는 명색 ‘작센 바이마르 아이제나하 공국’의 군주이긴 했으나 실은 18살의 애송이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트가 이미 1년 전부터 괴테를 만나려고 프랑크푸르트까지 찾아왔던 점으로 볼 때, 아우구스트는 제대로 된 인재 한 사람만 있으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던 것 같다.

그의 예상대로 괴테와의 만남은 바이마르를 유럽 문화 중심축의 하나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서양 문화사에 새로운 지평을 여는 사건이 됐다. 10대와 20대 두 애송이의 신선한 만남이 세계 역사 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든 것이다.

독일의 화가 오토 크닐레(Otto Knille)가 1884년에 그린 벽화 《바이마르 1803년》는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을 본따 바이마르에서 열린 가상의 모임을 상상하여 그려낸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당시 유럽의 각 분야의 거장들이었다. 즉 가운데의 석상은 호메로스의 조각상이며 조각상에 팔을 걸친 사람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맨 오른쪽의 인물이 프리드리히 실러, 오른쪽에서 세번째로 서있는 인물이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그 외의 인물들은 알렉산더 폰 훔볼트, 빌헬름 폰 훔볼트,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 카르스텐 니부어,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 아우구스트 빌헬름 슐레겔, 아우구스트 빌헬름 이플란트, 프리드리히 막시밀리안 클링거, 크리스티안 프리드리히 티크, 장 파울, 요한 하인리히 페스탈로치 등 당시 바이마르가 유럽 지성의 중심지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832년 괴테가 타계하면서 바이마르의 영향력이 쇠퇴하는 듯 하였으나 바이마르의 문화적 영향력은 계속 남아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프란츠 리스트, 프리드리히 니체 등 걸출한 철학자, 음악가, 문학가들이 바이마르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독일의 문화적인 역량은 지속적으로 발전한다.

유럽 지성들이 활동했던 바이마르, 꼭 한번 방문하여 그들의 흔적을 찾으며 고전주의에 심취해보기를 적극 권장한다.

1267호 31면, 2022년 5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