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곡 알리기’ 한 길 노래인생

소프라노 박모아 덕순 씨의 15주년 음악회, 삶과 기억

도시 공동체에서는 비교적 공연예술이 흔하다. 베를린이라는 도시는 예술적 풍요가 넘쳐흐르기에 문화적 갈증은 덜한 편이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한 2년의 공백은, 도시든 촌락이든 차별하지 않고 빗장을 닫게 했다. 더욱이 문화예술계에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정작 피해자는 청중이었다. 마음껏 예술의 감흥을 만끽할 수 없기 때문.

지난 5월 22일 오후 5시, 베를린 알트 뤼바스(Alt Lübars)의 랍잘(Labsaal) 콘서트 홀. 이날 열린 음악회는 가뭄을 씻겨준 시원한 빗줄기 같았다. 해갈을 알리는 음악회 소식은 시민들을 들뜨게 했다. 허기진 갈증을 채우느라 공연장은 더 열광적이었다. 매년 ‘우리 가곡 알리기’ 한 길을 걸어온 박모아 덕순 씨의 15번째 음악회의 모습이다.

2007년 첫 음악회 이후 정답고 산뜻한 꽃과 같은 감정의 기억이 있었다. 그를 본받아야 할 것은, 잊혀져가는 가곡을 통해 여전히 우리를 위로하고 행복을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간 앞에 절대 굴복함이 없다. 진정으로 음악을 사랑하는 이만이 소유할 수 있는 지속성의 힘이다. 독일 청중들에게 한국어 발음을 적은 노래가사를 나눠주어 함께 부른다. 독일 사람이 한국 노래를 따라부르고 한국문화와 마주한다. 때론 뜻 모를 가사를 읊조리다보면 깊숙한 감정 속으로 파고들어 대상과 마주하게 된다. 매년 공연 마지막에 청중과 함께 부르는 곡, ‘우리의 소원은 통일’과 ‘고향의 봄’은 이미 그들의 노래가 된 지 오래다. 공연 속에서는 언어의 낯섦이 오히려 소통 욕구의 근원이 된다.

음악회가 열린 알트 뤼바스. 베를린 중심지에서는 비교적 변방지역으로, 고즈넉한 전원풍경이 인상적이다. 인근 지역 주민들은 박모아 덕순 씨의 공연을 기다리며, 행사 일정을 달력에 표시해둔다. 그런 호응을 과시하듯, 콘서트 홀은 30분 전에 이미 청중으로 꽉 들어찼다. 170여 명 중 90%는 독일인이다. 한국인이 주최하는 무대에 독일인들이 더 많이 모인 것은 보기 드문 일이다. 변함없이 우리 문화를 음악으로 풀어내고 승화시키려는 소프라노 박 모아 덕순 씨의 결실이다. 그녀는 묵묵히 한국문화 알리미로 15년의 성상을 쌓았다.

이날 2시간 여 동안 진행된 음악회는 박모아 덕순 씨의 솔로 무대만 있는 건 아니다. 그녀가 이끌고 있는, 독일인으로 구성된 ‘도라지 합창단’의 무대와 함께 한인 예술인들의 다채로운 공연이 조화롭게 넘실댄다. 화동예술단 어린이들의 무용과 장고춤, 부채춤, 나이든 파독 간호사 출신의 고전무용, 가야금 산조는 물론 클래식 3중주가 연주하는 ‘그리운 금강산’도 일품이다. 행사는 다양한 메뉴가 섞인 비빔밥처럼 다채롭지만, 그 안에서 조화롭고 맛있는 향이 난다. 그녀의 음악회가 특별한 것은, 한국의 문화를 독일인들에게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독간의 문화교류의 지평을 넓혔다는 점이다.

공연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 그녀의 인생 음악회 스토리를 잠깐 담아본다.

1. 올해 15회라고 한다. 남다른 소회가 있을텐데.

– 이 행사를 2007년부터 시작했다. 사실 올해도 코로나로 15주년 행사를 하게 될지 안할지 감을 못 잡았다. 홀을 예약해놓고 조마조마했다(웃음) 원래는 대보름 기념으로 3월에 있을 행사인데 5월로 미루었다. 3월부터 코로나가 풀리면서 준비하는 데 서둘러, 사실 지금도 정신이 없다. 처음 음악회 시작할 때 ‘우리 문화를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알리자’였는데 15년이 흘렀다. 관중들이 해년마다 늘어난 게 신기할 정도다. 미리 예매를 물어오는 매니아도 있다. 이런 호응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세월과 함께 내 나이도 먹어갔다. 이제 손주도 생긴 할머니가 되었다.(웃음)

2. 지금까지 공연하면서 힘들었을 때가 많았을 것 같고, 보람도 있었을 듯하다

– 힘든 점들은 해년마다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보다 청중을 위한 한인 음식을 준비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많았다. 자비가 들어갈 수밖에 없는데, 언젠가는 아는 분이 김치를 기부하겠다 해서 감사했었다. 행사 준비는 남편이 많이 도와주지만 결국 나 홀로 작업이다. 광고와 표를 파는 것, 포스터 붙이는 작업까지 혼자 했다. 그래도 기억나는 행사는 10주년 때다. 시청홀에서 열렸는데 500여 명 넘는 청중이 왔다. 반응이 좋아 힘들었던 일이 눈 녹듯 사라졌다. 무엇보다 이 행사의 보람은 한국 문화가 독일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고 그것에 일조했다는 점이다.

3. 어떻게 이 행사를 시작하게 되었나?

– 외국에 오래 살다보니 고향이 그리웠다. 원래 파독 간호사로 왔다가 독일에서 음대를 졸업해 성악가가 되었다. 독창회를 할 때마다 우리 가곡을 불렀던 기억이 난다. 한국 가곡을 부르다보니 독일인들 중에 애호가들이 생겨났다. 이렇게 좋은 곡들이 많은데 우리 한국사람들끼리 말고 독일인들에게 더 알리고 싶었다.(보통 한국 행사에 주로 한국 사람들만 모였으니까) 내가 사는 라이니켄도르프 구에서는 알게 모르게 한국 노래를 좋아하는 청중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꾸준히 알려야겠다 생각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4. 공연 수익금을 사회로 환원시키더라

– 처음에 북한 라진병원에 후원을 하기 시작했다. 뮌헨 근처 성 오틸리엔(Sankt Ottilien)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라진병원을 건립했다. 그래서 북한의 어려운 의료요건을 개선하는 데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려고 했다. 이후에는 한인회관 증축기금이나 한인 봉사단체에도 후원하고 있다. 앞으로도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여타 단체들을 위해서도 꾸준히 지원하고 싶다.

5. 가곡을 주로 부르는데, 노래 선정은 어떻게 하나?

– 내 순서 외에 다른 프로그램과 적절한 조화를 생각한다. 주로 한국 가곡을 선정하고 한국 정서가 묻어 있는 곡을 좋아한다. 윤이상 곡도 특별한데 <고풍의상>, <달무리>, <그네>, <편지>는 그중 정수다. 이번 공연에는 독창곡으로는 <님이 오시는지>, <또 한 송이 나의 모란>을 불렀다. 도라지 합창단과 함께 <동무생각>, <도라지 타령>, <신아리랑>, <로렐라이>도 빼놓을 수 없는 애창곡이다.

6. 앞으로 희망이나 계획은?

– 건강이 주어진다면 음악회를 계속 진행하고 싶다. 그동안 틈틈이 서예도 공부했는데 서예 개인전과 음악회를 곁들인 행사를 하고 싶다. 현재 이끌고 있는 독일인들과의 ‘도라지 합창단’이 있는데, 한국 방문공연도 해보고 싶다.

글. 칼럼니스트 박경란

1269호 18면, 2022년 6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