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21)

바르트부르크 성(Wartburg)

교포신문사에서는 2022년 특집 기획으로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매주 연재한다.

독일은 서독 시절이던 1976년 8월 23일 유네스코 조약에 비준한 이래, 48건의 문화유산과, 3건의 자연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이탈리아와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한편 아픈 역사도 갖고 있는데, 2009년 현대적 교량 건설로 인해 자연 경관이 훼손됨을 이유로 드레스덴 엘베 계곡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서 제명된 것이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제명된 첫번째 사례였다.

독일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을 등재일 기준으로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한다.


1999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튀링겐(Thüringen) 주의 아이제나흐(Eisenach)에 위치한 바르트부르크 성은 중부 유럽 봉건 시대의 뛰어난 유적지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1067년에 짓기 시작한 성은 이후 지방영주의 거주지였으며 튀링엔 지방의 문화와 정치, 또 역사의 무대였다. 중부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봉건주의 시대의 건축 유물로 꼽히며 부분적으로는 봉건시대 모습을 가지고 있으나 19세기에 대대적으로 복원되었다.

역사적 배경

루트비히 데어 슈프링어(Graf Ludwig der Springer)가 세운 바르트부르크성은 단순한 군사 캠프였으나 독일에서 가장 훌륭한 성채 중 하나로 발전했다. 동서독일 나뉘었을 당시 이 성은 양국의 국경에 인접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독일 통합과 단결의 강력한 상징이기도 하다. 12세기 후반의 궁전 건물은 제국의 귀족으로서 루트비히 가문의 지위를 보여준다. 1777년 괴테가 이곳을 방문하여 폐허의 그림을 남겼는데, 궁전만이 부분적으로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게 보인다. 갈수록 증가하는 순례자에 힘입어 괴테는 박물관을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바르트부르크성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 고대 독일의 이미지를 부각하는 국민정서를 상징하는 곳이 되었다. 1817년 바르트부르크에서는 독일학생연합의 멤버 450명이 개최한 민족주의적 행사인 바르트부르크 축제가 열렸고, 1848년 3월의 혁명으로 더욱 굳게 하였다. 바르트부르크성은 독일 전체의 학생 연합회 본부가 되었다.

19세기 초반에 작센의 대공이 주도하여 성 전체를 완전히 보수하였다. 궁전의 잔해는 복구하였고, 외벽은 복원하였으며, 나머지 건물은 건축가 휴고 폰 리트겐(Hugo von Ritgen)의 감독 아래 재건하였다. 바르트부르크성 재건은 대부분 역사적 현실보다 낭만적 상상을 기반으로 하였다.

1945년에 아이제나흐(Eisenach)가 폭격을 당했을 때 바르트부르크성은 피해를 입지 않았으나, 뒤에 소련 군대가 약탈하였다. 독일민주공화국(구동독)은 바르트부르크성을 국가 기념물로 지정하였으며, 독일 통일 이후로는 실내와 궁전 정면의 석조물 보존에 복원 작업을 집중하였다.

이 성은 북쪽과 남쪽이 보이는 바위 돌출부, 아이제나흐 시를 내려다보는 숲의 한가운데에 있다. 이 성의 배치는 본질적으로 처음 요새 형태를 따랐다. 특히 궁전, 성벽, 남쪽 망루와 옹성(瓮城)이 그렇다. 외부 돌출부는 현재 일부 묻혀 있거나 폐허가 되었다.

건축 측면에서 바위 돌출부는 북쪽 끝에 닿아 있고, 도개교(跳開橋)가 있는 망루가 있으며, 다른 별채 건물들과 함께 바깥쪽 뜰을 구성한다. 그다음에는 낮은 뜰이 있는데, 이곳에는 본성과 궁전이 있고 뒤에는 기사들의 목욕장이 있다. 남쪽 망루는 돌출부의 가장 먼 끝에 있다.

마르틴 루터

교회개혁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으며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루터를 보호했던 곳이 바르트부르크성이었다. 1521년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교황에게 파문당한 후 작센 선제후인 프리드리히(Friedrich)의 보호 아래 비밀리에 바르트부르크성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는 융커 외르크라는 이름으로 신분을 숨기고 1521년부터 2년 동안 저술에 정진하였다. 마르틴 루터는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신약성서』를 그리스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하였다. 그의 유배는 1522년 3월에 끝났으며, 16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마르틴 루터로 말미암아 많은 순례자가 이곳을 방문하였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의 결과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일반인이나 평신도들이 성경을 갖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대였다. 겨우 미사 때에 사제들에 의해 읽혀지는 몇몇 구절들만을 들 수 있을 뿐이었으며, 그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성경을 일반 신자들이 교회와 학교와 가정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는 종교개혁에도 강력한 도움을 주었다.

루터가 저술에 몰두한 공간은 소박한 나무 책상과 의자가 전부인 한 평 남짓의 작고 낡은 방이다. 이 곳은 현재 루터방(Lutherstube)이란 이름으로 여행자들에게 공개되어 있다.

음유시인 대회

바르트부르크성은 또 중세의 음유시인(Minnesänger)의 대회 장소로서도 유명하다.

중세의 음유시인이란 약 12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활약하던 시인이나 음악가로써 방랑시인 또한 이에 속했다. 주로 크게 출세하지 못한 귀족이나 기사출신이였다.

12세기 말엽부터 바르트부르크성에서는 궁정 문학이 발달하였는데, 백작 헤르만 1세는 시인과 음악가들을 초대하였다. 발터 폰 데어 포겔바이데(Walther von der Vogelweide)의 시는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있었던 음유시인대회가 만들어진 이곳의 화려한 사교 생활을 묘사하였다. 이는 훗날인 1842년에 여행 중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던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에게 오페라 탄호이저(Tannhäuser)를 구상하는 배경이자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100석 규모의 예배실, 연주홀 등을 갖추고 지금도 예배와 연주가 열리는 이곳은 중세 영주들의 문화예술에 대한 옹호와 후원을 실감케 한다.

1269호 31면, 2022년 6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