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돌아와야 할 우리 문화유산 -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21)

가토 기요마사가 강탈한 『의방유취』

『동의보감』보다 약 150년 앞선 『의방유취』

우리나라 사람 중 허준과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동의보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 등 동아시아 전통 의학을 집대성한 의학 백과사전이자 이미 17세기에 예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국민의 건강은 국가의 책임이라는 근대적 공중보건의 개념을 보여주는 유산이다. 우리나라 국보 제319호에 지정되어 있으며 2009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도 등재되어 그 가치를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동의보감』을 편찬할 때 허준이 참고했던 또 다른 의학서적인 『의방유취』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의방유취』는 『동의보감』보다 약 150년 앞선 시기에 국내외의 다양한 한의학 관련 문헌을 집대성한 의학 백과사전으로, 국가의 주도로 편찬된 동양 최대의 의학서적이다.

이러한 역사적・의학적 의의가 큰 유산임에도 『의방유취』는 국보도 아닌 보물 제1234호에 지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의방유취』는 어떠한 책이며 왜 이렇게 덜 알려지게 되었고, 또 국보도 아닌 보물에 지정되어 있는지 그 내막을 살펴보자.

책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방유취(醫方類聚)』는 임상적 처방을 병의 증상에 따라 분류하여 집성한 한의방서이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1445년 편찬되어 여러 차례의 교정 작업을 거쳐 성종 때 정리되어 간행된 의학서적으로, 국가의 투자와 노력이 집중된 대규모 사업이었다.

약재서적인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 1433년 편찬되자, 세종은 이번엔 조선의 의학서적을 집필하고자 했다. 이에 세종은 1437년부터 1439년까지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이나 역관들에게 중국에 있는 다양한 의학 서적을 수집하도록 하여 당나라, 원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 중국 내 다양한 시대의 의학문헌을 구해 이를 조선의 의학서적과 함께 취합하며 정리하는 작업을 실행해 나갔다.

집현전 학자들을 주축으로 의원들과 안평대군까지 참여하여 1442년부터 3년 동안 문헌 취합과 정리 작업 끝에 365권에 이르는 방대한 의학 백과사전 『의방유취』가 탄생하게 된다.

그러나 세종 때 편찬된 『의방유취』는 수집한 서적들을 단순히 분류하고 묶어 놓은 것이었기 때문에 중복되는 내용이 많았고, 임상적으로 검증되지 않았거나 심지어는 잘못된 부분들도 더러 있었다. 더욱이 300권이 넘는 분량으로 인해 활자로 간행되지 못했고 널리 보급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세조는 즉위한 후 『의방유취』를 재정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1465년부터 기존에 취합한 서적과 문헌들을 다시 분류하고 내용을 다듬어 수정과 교정 작업을 진행한 끝에 12년이 지난 성종 8년인 1477년에 이르러서야 266권으로 정리했으며 완전한 판본으로 간행했다. 기존 365권에서 266권 264책으로 정리되어 편성되었으나 여전히 방대한 분량 탓에 단지 30부만 인쇄하여 내의원과 조선 정부가 관리하는 여러 서고에 분산하여 보관토록 했다. 『의방유취』는 을해자로 알려진 금속활자로 인쇄되었기에 문화사적으로도 그 의미가 상당하다.

문화재 약탈 전쟁의 전리품이 되다

그렇다면 30부가 인쇄되어 각 지방의 국가 서고에서 관리되던 『의방유취』는 어쩌다 바다 건너 단 한 부만이 일본 궁내성에 남겨지게 된 것일까? 1592년,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다. 임진왜란의 또 다른 이름은 문화재 약탈 전쟁이다.

임진왜란 전, 일본은 조선보다 문화적으로 많이 뒤떨어져 있었고, 조선 침략전쟁을 일으키면서 문화재 약탈을 위한 특수 부대를 따로 편성할 정도로 조선 문화 약탈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문서 식별 능력이 없었던 일반 군인들 대신, 지식층이었던 승려들을 따로 파견해서 서적 약탈을 위한 특수 부대인 종군문사참모부를 꾸렸다.

서원과 사찰, 궁궐에서 약탈해 간 서적만 10만 권이 넘는데, 이로 인해 일본의 학문은 크게 발달하고 문화도 꽃피워 에도 막부의 전성기를 이루었고, 현재 일본문화의 근간을 마련하게 된다.

이때 약탈된 서적 중에 바로 『의방유취』가 있었다. 일본군 장수였던 가토 기요마사는 조선의 서고를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불 질렀는데, 이 과정에서 『의방유취』가 일본으로 넘어가고 나머지 분산 원간본은 모조리 소실되고 말았다.

그렇게 약탈된 원간본은 12책이 분실된 채 총 250권 252책만이 남아 일본의 궁내성 서릉부 도서관에 보관되어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후 일본 내에서 여러 본이 복간되어 보급되었고, 이로부터 일본의 의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거의 300년이 흐른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은 궁내성에 몰래 보관되어 전해지던 을해자본 『의방유취』의 원본이 정작 조선에서는 망실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때 강화도조약 체결을 기념하고 조선과 일본의 우호를 기원한다는 의미로 일본인 의사였던 기타무라 나오히로가 일본판 복사본 『의방유취』 2부를 조선 정부에 기증했다. 그가 기증한 『의방유취』는 금속활자로 찍은 원본이 아닌 목간본이었으나 불행 중 다행으로 원본과 같은 264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본래 우리나라의 독자적이고 자랑스러운 의학대백과 사전이었으나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지 않아 『의방유취』를 구할 수도 또 이를 연구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약탈해 간 일본에 의해 역수입되어 그때서야 비로소 『의방유취』에 대해 자세히 알고 연구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아이러니한 상황인가.

이렇게 조선으로 전해진 『의방유취』 2부 중 1부는 장서각 도서에 보관되었고, 나머지 1부는 고종의 어의였던 홍철보에게 하사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의방유취』의 복간을 시도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던 『의방유취』는 한국전쟁 중 이리저리 흩어져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홍철보에게 하사된 1부는 여러 경로를 거쳐 현재는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270호 30면, 2022년 6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