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고, 잊고 또는 숨겨진 우리 문화유산 이야기(28)
돌짐승은 정말 무령왕릉을 지켜 왔을까 ➀
국립공주박물관이 돌짐승을 대표 브랜드로 선정하다
충남 국립공주박물관 입구에는 희한하게 생긴 조형물이 하나 서 있다. 머리에 뿔이 하나 난 것으로 보아 해치(獬豸)인가? 하고 보니 다르다. 뭉툭한 입과 코, 짧은 다리, 등에 난 갈기 등, 돼지를 닮은 듯한 이 조형물의 이름은 진묘수(鎭墓獸)다. 무덤을 지키는 짐승으로 돌로 만들었다 하여 석수(石獸)라고도 한다. 이보다 친근한 우리 표현은 ‘무덤을 지키는 돌짐승’ 이다.
이 돌짐승을 설명하는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 이 모형은 무령왕릉 널길에서 발견된 진묘수를 7배로 확대하여 제작한 것이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 출토 국보 제162호 진묘수(석수)를 박물관 대표 브랜드로 선정하고 관람객과 국립공주박물관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로 설치하였다.
진묘수는 중국 고대부터 나타나는 상상의 동물로, 무덤을 지키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신선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무령왕릉 출토 진묘수는 머리에 뿔이 있고 몸에는 날개가 달려 있으며, 신체의 일부는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로 붉게 칠해져 있다.”
― 국립공주박물관 안내판
그렇다면 돌짐승이 국립공주박물관의 대표 브랜드로 선정된 이유는 뭘까? 수호신의 의미로 설치한 것으로 보아, 이 속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하다. 참고로, 국립공주박물관에는 국보로 지정된 돌짐승 외에도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가 19건이나 있다.
금제관장식, 금귀걸이, 은팔찌, 베개, 발받침, 청동거울, 지석…….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이 총 108종 4,600여 점이다. 이 중에 12건 17점이 국보로 지정이 되었다. 지금껏 왕릉에서 출토된 유물 중 가장 많국립공주박물관에 있는 돌짐승은 유물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다. 역사와 예술의 가치에서도 매우 훌륭한 유물이 많아 한 곳의 출토물로는 가장 많은 수의 유물이 국보로 지정된 것이다.
참고로 현재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는 총 328건이다. 이 중에 불국사와 관련한 문화재가 다보탑, 석가탑을 포함하여 8건이 있으며 국보 제126호인 불국사삼층석탑내발견유물(佛國寺三層石塔內發見遺物)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외 27점을 한데 묶어 국보로 지정했고, 국보 제206호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모두 54종 2,835판인데, 이 가운데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28종 2,725판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비교해 보니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의 가치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웅진 백제 고분 도굴왕 가루베 지온을 기억하고 기록하다
무령왕릉이 발견된 것은 1971년이다. 왕릉의 위치는 공주 송산리에 있는 백제왕과 귀족들의 무덤 7기가 어울려 있는 곳이다. 이와 인접한 고분이 6호분이다.
송산리 고분군은 일제강점기 당시 수많은 문화재 약탈범들의 도굴 대상이었다. 그중에는 일명 ‘도굴왕’으로 불리는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라는 일본인이 있었는데, 1925년 3월 조선에 들어온 가루베는 1927년 공주공립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송산리고분 등 백제 고분 약 1천 곳을 도굴한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가 도굴한 1천여 기의 고분 중 백제양식의 고분으로 분류된 것만 해도 730 여 곳에 이른다. 그중에 무령왕릉과 인접한 송산리 제6호분이 있었다.
1933년 도굴한 6호분은 규모나 양식으로 보아 웅진 시기 백제왕인 문주왕, 삼근왕, 동성왕, 성왕 중 한 사람의 무덤일 것이라고 한다.
당시 도굴당한 6호분의 상태에 대해 “빗자루로 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정도로 토기 조각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는 증언이 있다. 가루베가 훔친 유물의 종류와 양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끝까지 자신이 저지른 도둑질과 문화재의 반출 행위를 부정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알몸으로 도망쳤다는 그의 주장과 달리 한 트럭 분량의 유물을 싣고 대구로 가서 또 다른 도굴꾼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함께 일본으로 밀반출했다는 증언들이 있지만 광복 이후 한국 정부의 반환 요청에 가루베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자신은 조선의 유물을 도둑질하지 않았고 또 그 유물을 자국으로 반출하지도 않았다는 가루베 지온의 말이 명백한 거짓이라는 증거는 곳곳에 남아 있다. 바로 그가 수집한(또는 훔친) 유물들에 대한 기록을 스스로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1946년에 가루베가 쓴 『백제미술』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공주에서 출토 한 높이 7센티미터의 ‘금동여래상’, 1930년 부여군 규암면 내리에서 출토한 높이 5.7센티미터의 ‘금동협시보살상’, 1931년 가을 공주군 목동면 부근에서 출토한 높이 18.2센티미터의 ‘금동보살상’ 등은 가루베가 소장한 송산리 제6호분 출토유물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허리띠 장식(대금구), 큰칼(대도), 순금으로 만들 귀고리, 둥근 옥(환자) 등 수많은 유물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 유물들은 대부분 고분에서 출토한 것들이다.
그럼 누가, 언제 고분에서 이 유물들을 파내었단 말인가.
당시엔 무덤을 발굴하는 것이 조선인들에게는 금기시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마치 보물 사냥하듯이 공공연히 조선의 무덤들을 파헤치고 다녔다.
이처럼 싹쓸이 당하듯 빼앗긴 조선의 유물들은 어디로 갔을까? 가루베가 수집한 유물들은 현재 도쿄국립박물관, 와세다대학 등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교토에서 골동품 상점을 하던 형제(가루베는 넷째)를 통해 흩어졌다고도 한다.
가루베 소장품에 대해서는 다음호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한다.
1277호 30면, 2022년 8월 5일